에필로그. 일상으로부터의 초대
제법 바람이 차다. 김동률 노래가 다시 따뜻하게 느껴지는 걸 보니 유독 더웠던 올해 여름에 그렇게 간절히 바라던 쌀랑한 바람이 부는 계절이 왔나보다. 출근을 하면서 긴 외투를 걸쳤다. 아마 여행 후반부터는 반팔을 입었으니, 여행을 하고 나서 처음 입는 긴 팔 인듯 싶다. 그 때 그 향이 다시 느껴지는 것 같아 기분이 싱숭생숭하다. 벌써 한 계절이 지나갔구나. 마냥 좋을 줄만 알았는데, 그렇것만도 아니다. 바람이 불어 올 수록 올해의 마지막이 다가옴이 느껴지고, 마음이 급해질수록 마음의 빈 자리가 더욱 시려온다.
두 사람이 같은 감정을 갖는다는 건 정말 대단한 일이다. 모든 것은 타이밍이라고 하는데 여행에서는 이 곳에 있음이 감사해 매 순간이 타이밍이었다면 생활 속에서는 이런 타이밍을 의식적으로라도 자꾸 만들어나가야 하는 거라 힘이 드는 건지도 모르겠다. 사실, 여행을 다녀오고 나서는 어떤 하루 였는지 매일이 기억나지 않는다. 오히려 큰 일이 일어 나지 않았던 하루하루라 다행이라는 게 솔직한 소감이기도.
기억나는 여행 뒤 기억나지 않는 일상의 하루하루를 모아 다시 이 여행을 기억해 본다.
#1.
몇 달 째 매주 토요일 아침엔 치과 치료를 받고 있다. 요즘은 오른쪽 윗 잇몸에 마취를 하는데 단 몇 시간뿐인데도 불편한게 이만저만이 아니다. 입술이 모아지질 않으니까 립밤이나 립스틱 바르는건 꿈도 못 꾸고, 뭘 마실수도 없다. 예전엔 아플까봐 치과를 못 갔다면 지금은 마취가 무서워서 못가겠다싶다. 언젠가는 치료를 끝내고 약속보다 일찍 와 앉아 읽은 책 첫 구절이 '우리가 웃고 떠들며 함께했다는 것만으로도 이 거칠고 추한 세상을 조금은 아름답게 만들었다고 믿는다' (신용목/우리는 그렇게 살겠지) 아. 이 만남, 예감이 참 좋다.
#2.
내 가능성을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 듣는다는 건 가슴이 떨리다 못해 심장이 움켜쥐어지는 느낌이다. 수만 번의 자기 합리화도 무용지물이 되어 버리는 순간. 무엇을 위해 이렇게 아둥바둥 심장 조아리며 견디는걸까. 소화 잘 되라고 고기까지 씹어줄 순 없어도 적어도 아 어떻게 줘야 소화가 잘 될까 고민은 두어번 쯤 해야 두 사람의 관계에 의미있는 발전이 생기는 법인데 모두가 다 나만 사는 세상에 있다. 내가 널 생각하는 만큼 너가 날 생각해주길 바랬는데 그 만큼이 아니어서 화가 났다는 지나간 누군가의 지난 말이 머릿 속에 맴도는 지금, 나는 도대체 왜 이렇게까지 허탈한 이 생각을 멈출 수 없는걸까. 또 한 번 숨고 싶다. 많이 무던해 졌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닌 내가 너무 싫어진다.
#3.
여행을 예약하는 올 해 초만해도 여행을 다녀오면 적어도 내 환경의 서너요인엔 변화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글자 그대로 정말 아무것도 변한 것이 없다. 그래서인지 생활에 변화를 주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을 보면 참 부러워 진다. 동시에 그렇지 못한 내가 너무 못나 보이고 마음이 스쿠류바마냥 풀릴 기미 없이 베베 꼬인다. 사람은 원래 작은 거에 한없이 옹졸해지는 거라 믿으며 다시 한 번 자기합리화를 해보려는데, 이번엔 왠지 실패 할 것 같다. 변하자. 내 자신에게 당당해 질 순간을 두 팔 벌려 환영하자. Big girls don't cry.
그 때 힘이 없어 용서를 빌지 못한 그 사람도 아직 나다. 그 때 용기가 없어 고백하지 못한 그 사람도 여전히 나다. 돌에 새기지 못해 잊어버리 그 많은 은혜도 다 나다. 아직도 내가 낯설어하는 내가 더 있다. (밖에 더 많다/이문재)
일상에서 마주치는 소중한 순간들에 감사하기
안 먹어도 배고프지 않고, 2만보씩 걸어도 아프지 않은 여행의 여운마저 희미해진 요즘, 바람에 날려 낙엽이 지는 계절엔 따뜻한 눈빛을 느끼고 싶은 서른의 나다. 비록 지금은 이렇다 할 것 없는 일상보다 더 일상스러운 하루를 보내고 있지만 언젠가는 바람에 우리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듯했다고 말해주는 사람냄새 나는 사람들과의 평범해도 특별한 순간을 기대해보며 일상에서의 또 다른 여행을 꿈꿔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