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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nnyi Oct 24. 2015

그들이 사는 세상, 노희경 (2008)

나도 사는 그들이 사는 세상

나란 존재는 참 아이러니하다. 누군가를 믿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믿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쿨해지려고 부단히 노력하면서도 어김없이 핫해진다. 마음은 실력이라고 노래를 부르는 친구 앞에서 나는 항상 잎새에 이는 작은 바람에도 천방지방으로 흔들리는 갈대가 되어버린다.


나 자신이 너무 초라하다. 왜 이렇게까지 초라한 기분을 느껴야 하는지 모르겠다. 하긴, 사계절을 다 타긴하는게 가을이구나. 그래, 불금이고 뭐고 간에 '그들이 사는 세상'이나 곰국 우려내듯 다시 봐야겠다.


the most favorite ever. 출처 KBS.


이 드라마가 방영했을 때 나는 미국에 있었는데, 모르고 있다가 언젠가 실시간 검색어에 뜨는 걸 보고 한 번 슬쩍 본다는게 정신을 차리니 앉은 자리에서 14편을 내리 보고 있었다. (그땐 미국에 나중에 또 오면 되지라고 쉽게 생각한 바보 멍청구리 학생이라 하루를 저렇게 무의미하지만 유의미하게도 보냈더랬다) 와- 도대체 이 리얼리티는 뭐며, 매 에피소드마다 이어지는 주준영과 정지오의 내레이션은 진짜 심 to the 쿵. 어떡하죠 내 심장이 고장 났나 봐.


아무튼 그때부터는 나는 이유 없이 기분이 울적하다 싶을 때는 무조건, 딱히 할 거 없는 누워만 있고 싶은 주말에도 무조건, 특히 찬바람이 분다 싶으면 더더 무조건. 늦가을x초겨울이 느껴지면 슬슬 그사세로 방한 준비를 시작했다.


 결국 주준영과 정지오 사겼다. 충격적으로 좋았던 열애설. KBS.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이유는 저마다 가지가지다. 누군 그게 자격지심의 문제이고, 초라함의 문제이고, 어쩔 수 없는 운명의 문제이고, 사랑이 모자라서 문제이고, 너무나 사랑해서 문제이고, 성격과 가치관의 문제라고 말하지만 정작 그 어떤 것도 헤어지는데 결정적이고 적합한 이유들은 될 수 없다. 모두 지금의 나처럼 각자의 한계일 뿐 (ep.11,정지오)


공유하고 싶은 백만가지 대사 중에서 이 내레이션은 단연 빼 놓을 수 없다. 그사세 입문(이라고 쓰고 입덕/씹덕이라고 읽는다) 시킨 바로 그 장본인. 주위 친구들에게도 몇 번이고 인용했던, 정말 너무나도 현실적인 이야기. 이별이라는게 이걸 다 뛰어넘을 만큼 사랑하지 않는 모두 각자의 한계의 문제라는데 밑줄 쫙. 플라스 별표 열 개. 나의 모든 한계를 잊게 해 줄 the only one을 만나길 기대하지만 나는 이제 29.9세를 향해 달려갈 뿐. 또르륵


 너무 많이 봐서 그런가. 가끔은 어떤 상황에 놓이고 어떤 기분이 들면 내 귀에서 그사세 내레이션이 읊어지기도 하는데, 어쩌면 오늘이 그런 날 중 하나였을지도 아니 그 날이었다.


드라마 속 인물처럼 살고 싶었다. 동료가 잘 나가면 가서 진심으로 축하해주고 자격지심 같은 건 절대 없으며 어떤 일에도 초라해지지 않는. 지금 이런 순간에도 큰소리로 괜찮다고 할 수 있는 그런 인물이 되고 싶었다. 그런데 왜 나는 괜찮지 않은 걸 늘 이렇게 들키고 마는지. (ep.10,정지오)


아. 내 어깨가 자꾸 움츠려 들고, 그걸 감추고 싶어 목소리도 한 껏 올라가고, 실없이 라랄랄 소리나 지껄이는 모습까지 진짜 찌질하고 후진 모습을 다 들켜버린 것 같은 오늘이었다. 선택의 보기 조차 되지 못하나에 대한 자책이 나란 존재가 정말 너무  보잘것 없고, 미래가치성이 없음으로 느껴져 참 안면근육을 의지대로 움직이기 힘든 24시간이었다. 아 진짜 뭐 하나 마음대로 되는게 없네. 한창 내가 취직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을 때 아빠가 해준 주옥 같은 명언이 있다. '써니야. 인생은 점으로 이뤄진 선이라서, 그 점이 어디에, 어떤 크기로 찍혀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아. 다 지나고 보면 너무 작은 점이라 보이지 않을 거니까 멀리 크게 봐' 눈 앞의 일에 일희일비하고 있는 나는 진짜 완생이 될 수 없는 천생 미생인 건가. 아 이 보잘것 없는 미생의 아이콘이여 (반면, 우리 아빠 완생 인정. 만세)


이 분들 그래도 김삼순 때는 호텔업을 하는 부자 할머니-손자로 나왔다. 출처 KBS
어머니가 말씀하셨다. 산다는 건 늘 뒤통수를 맞는 거라고.. 인생이란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어서 절대로 우리가 알게 앞통수를 치는 일은 없다고. 나만이 아니라 누구나 뒤통수를 맞는 거라고 그러니 억울해말라고. 어머니는 또 말씀하셨다. 그러니 다 별일 아니라고 하지만 그건 육십 인생을 산 어머니 말씀이시고 아직 너무도 젊은 우리는 모두가 다 별일이다. 젠장. (ep06,정지오)

막상 볼 땐 그러려니 하고 넘겼는데, 갈수록 생각나는 대사가 바로 요거다. 페이스북에서 많이 돌아다니는데,  그때마다 나도 모르게 스르륵 손이 좋아요를 누르고 있는 그 대사. 묘하게  위안받는 건, 뒤통수 맞는 인생인 나 뿐만이 아니라는 것. 다들 한 번쯤은 겪으니까 이렇게 대사로도 쓰이고, SNS에도 심심치 않게 돌아다니는 거 아니겠나. 괜찮아. 다 이겨내면 그 뿐.



'길게 보자, 잘되겠지'를 되뇌는 요즘이다. 모든게 마음대로 되질 않는 날의 연속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호흡 한 번 크게. 하쿠나 마타타. 다 잘 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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