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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nnyi Oct 25. 2015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 신경숙(2010)

오늘을 잊지 말기 위한 어나벨

내.가.그.쪽.으.로.갈.까
내.가.그.쪽.으.로.갈.께


책을 살 때 작가의 말과 차례를 가장 먼저 읽어보는데, 내가 기억하는 가장 충격적인 소설 목차였다. 정말 제대로 심장이 쿵-하고 내려 앉았다. 정말 14 음절의 마술이라는 유치한 말밖에.


얼마 전에 문득 "거기서 기다려 곧  갈게"라는 말 대신 " 내가 그 쪽으로  갈게"라는 말이 떠오르더니 머릿속에 한동안 머물던 이 소설. 이번 주말 날도 너무 좋고, 볕도 너무 좋아 자연스럽게 다시 뽑아 카페로 향했다.


사실 이 책이 한창 핫할 때는 그리 관심이 가지 않았다. 정신머리 없던 대학교 4학년 시절엔 뭔가 소설 읽는 건 도움이 안 되는 그런 일이 같았으니까(더군다나 이렇게 약간 다크니스한 소설은 더더욱.  그때만 해도 내 삶이 장밋빛 x오렌지빛일 줄 알았다. 지금은 노코멘트).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취업스터디를 기다리면서 우연히 집에 꽂혀있는 책을 들고 나왔는데, 아마  그때부터였을 거다. 다시 소설을 읽기 시작한 건. (그때 읽은 책은 귀욤 뮈소의 '당신, 거기 있어  줄래요?'였다)


이 책은 80년대를 배경으로 대학생들의 정신적인 상처와 치유에 대한 내용이다. 특히 나는 이 시대를 배경으로 한 대학생활을 이야기하는, 뭔가 매캐한 최루탄 냄새나는 소설을 좋아하는데 아무래도 이문열의 젊은 날의 초상(1981), 황석영의 오래된 정원(2000)의 영향이 아닐까 싶다. 뭐 아무런 연결고리도 없는 것 같기도 한데, 아무튼 나의 개똥기준에선 그렇다. (두 작품은 다 시험기간에 도서관에서 읽은 작품이라 세상에서 제일 기억에 남을 수 있다는 변명을 해본다. 그땐 경제지도 재밌을 때라는 점도 함께 명시한다.)


말 하지 않아도 김혜진을 알아요 그녀는 예뻤다(2015) 출처 MBC



서로에 대해 알게 되는 것, 비밀을 공유하는 것이 서로의 관계를 가깝게 해준다고 여겼던 적이 있었다. 가까워지기 위해서 내키지 않는 비밀을 털어놓는 적도. 혼자만 간직하고 있던, 말로 꺼내기 어려웠던 소중했던 비밀이 다음날 아무렇지도 않은 일이 되어 다른 사람들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고 있는 것을 알았을 때의 상실감. 누군가에게 마음을 털어 놓는 일은 가까워지는 게 아니라 가난해지는 일일뿐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그때 했던 것도 같다. 누군가와 가까워지는 일은 오히려 침묵 속의 공감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p.112)


마음을 나눈 것에 대한 어려움을 이렇게 낭만적으로 표현할 수 있다니. 진짜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지 않나. 진짜 이 맛에 소설을 읽는 거다 싶을 정도로 공감하고 공감하고 거듭 공감. 사회생활을 하면 할수록 마음 단속을 더욱 철저하게 하려고 하는 거 같다. 뭔가 학교 다닐 때처럼, 다들 천방지축으로 날뛸 땐 'you 망, I 망, We 망'의 가볍고 즐기는 마음가짐으로는 처절하게 'only I 망'만 느끼게 되는 거 같아서. 오히려 침묵의 공기가 어색하지 않고, 침묵 속에서 애정을 확인하는 관계가 더욱 소중해지는 이유랄까. (내 high 한 이상형 허들 하나 더 늘었다)


여름이 가면 가을이 온다. 사랑하는 500일의 썸머 (2009)



학생은 나의 이십 대 시절에 비추어 지금 이십대들에게 가장 해 주고 싶은 말이 무엇이냐고 물었다.(중략) 함께 있을 때면 오.늘.을.잊.지.말.자 고 말하고 싶은 사람을 갖기를 바랍니다. (중략) 여러분은 내.가.그.쪽.으.로.갈.게 라고 말하는 사람이 되었으면 해요. (p.365)



이 책은 주로 출퇴근 길 지하철 안에서 읽었던 기억이 난다. 그 덜컹거림 속에서 너무나 인상적이 었던 이 말. '내.가.그.쪽.으.로.갈.께'. 내 마음도 덜컹덜컹 덜렁덜렁. 언제부턴가 자꾸 뭔가를 바라는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이거 안 해주나. 저거 안 해주나. 왜 안 해주지. 실망이야. 나는 너에게 이것밖에 안 되는 사람이었나 하는 생각에 서글프기도, 속상하기도. 이 말을 듣는 순간, 아 왜 나는 받으려고만 하는 걸까 라는 반성에 책을 덮고 멍하니 있었다. 내가 먼저 주면 되는데 그거 하나 하기가 그렇게 어려웠나 하는 부끄러운 생각에. 내가 먼저 그 쪽으로 가겠가는 사람이 되어야지. 물론 이 말을 해주는 멋쟁이를 만나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29.8세가 시작되려고 한다. 2달 뒤에는 지구가 멸망할 거 같은 느낌이 드는/ 멸망해도 괜찮을 것 같은데 10월도 벌써 빠이 짜이찌엔 사요나라. 이제 진짜 내가 먼저 용기냄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모습으로 20대 마무리를 해야겠다는 다짐이 든다.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릴 때, 언젠가 언젠가는 나와 함께 함께 늙고 싶다는 사람을 만나고 싶다. 그리고 말하겠지. 내.가.그.쪽.으.로.갈.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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