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북한산
잦은 한파 속에서도 고대하던 눈이 내려 주어 겨울이 덜 춥게 느껴진다. 하얀 눈 덕택에 펼쳐질 겨울 산의 아름다움과 정취가 보고파 북한산 둘레길로 향했다. 북한산은 서울의 주산(主山, 배경이 되는 산)답게 21개나 되는 둘레길을 품고 있다. 주말·휴일 느지막이 일어나 아침밥까지 잘 먹고 찾아가도 겨울 산행의 즐거움과 운치를 느낄 수 있는 곳이라 더욱 좋다.
북한산 둘레길의 미덕은 산과 숲을 지나면서도 험하지 않다는 거다. 오르막길이 있지만 경사가 순하고 평탄한 길이 대부분이라 눈 내린 겨울에도 걸음걸음이 가뿐하다. 나무 데크길, 산길, 숲길이 구불구불 오르락내리락 이어져 따분하지 않고 걷는 재미가 있다. 화려한 색깔이라곤 눈에 띄지 않는 흑백의 풍경이지만, 한 폭의 수묵화 그림처럼 아름다운 산행길이다.
주말이면 알록달록 등산복을 입은 사람들로 인파를 이루는 서울 전철 3호선 불광역 2번 출구로 나오면 북한산 둘레길 표지판과 함께 북한산 생태공원이 나온다. 북한산 둘레길 8코스 ‘구름정원길’이 시작되는 공원이다. 구름정원길이라니 애니메이션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북한산 생태공원 뒤로 눈 내린 북한산의 멋들어진 능선이 펼쳐져 있어 한껏 기대감이 솟았다.
숲·산·마을을 지나는 북한산 둘레길
눈 내린 북한산은 어디나 운치 있고 좋지만, 이 코스는 특히 아름다운 것 같다. 하얀 눈이 내려 산길과 나무 위에 쌓이면서 정말 구름 위를 걷는 기분이 드는 길이 이어진다. 멋들어진 수묵화를 보는 듯 눈이 소복하게 내려앉은 소나무들이 숲길 도처에 서있다. 나뭇가지 위에 집을 지은 까치들도 눈이 반가운가보다. 겨울 산에서 들려오는 까치소리, 까마귀 울음이 무척 생생하게 다가온다.
‘뽀드득 뽀드득’ 발걸음을 뗄 때마다 들려오는 경쾌한 소리를 들으며 걷다보면, 서울의 진산(鎭山) 북한산의 우뚝한 풍모를 감상할 수 있는 포토존을 만난다. 구름정원길의 백미 가운데 한 곳으로, 눈 내린 산봉우리 풍경이 아름다워 절로 발길을 머물게 한다. 능선에 쌓인 겨울눈 덕분에 북한산의 위용이 한결 돋보인다.
둘레길 중간에 놓여있는 전망대나 쉼터마다 써놓은 명언 가운데 프랑스의 작가 장자크 루소가 남겼다는 글이 기억에 남는다.
나는 걸을 때만 명상을 할 수 있다
걸음을 멈추면 생각도 멈춘다
나의 정신은 오직 나의 다리와 함께 움직인다
북한산 둘레길은 산기슭에 기대어 사는 동네를 스치듯 지나가기도 한다. 경사진 언덕길마다 스피드를 즐기며 신나게 노는 동네 아이들 모습은 보기만 해도 웃음이 난다. 종이박스나 포대자루 하나로 겨울 스포츠를 만끽하는 아이들은 놀이의 명수다. 길섶에 쌓인 눈을 뭉쳐 던지며 눈싸움을 걸었다가 아이들이 떼로 덤벼들어 산속으로 도망쳐야 했다.
추운 겨울날 찬바람을 맞으며 맛과 영영가가 더 높아지는 시래기(무청), 단층의 낮은 집 지붕위에서 해바라기 하는 고양이들도 정답다. 그러고 보면 강변보다는 산변 집에 사는 게 더 좋을 듯싶다. 창밖으로 보이는 사계절을 느끼며 살다보면 마음이 덜 삭막해지고, 시간도 덜 빠르게 흐르지 않을까 싶다.
숲길을 걷다가 누군가 쳐다보는 느낌이 들어 뒤를 돌아봤더니 사람은 없고 나뭇가지 사이로 흰 달이 떠있었다. 태양빛이 약해지는 겨울날 종종 모습을 드러내는 낮달이었다. 겨울철에만 볼 수 있는 특별한 달이구나 싶어 눈길이 절로 머물렀다. 달에도 눈이 내렸는지 낮달의 낯빛이 유난히 하얬다.
북한산 둘레길에서 만난 한옥마을과 진관사
구름정원길이 끝나는 곳에 진관사 이정표가 여행자를 맞는다. 동네이름 진관동을 낳은 고찰로, ‘좋은 산은 좋은 절을 품는다’는 말에 잘 어울리는 곳이다. 진관사 가는 길, 서울시 보호수로 지정된 두 그루의 노거수 나무가 발길을 붙잡았다. 북한산 아래 자리한 은평 한옥마을을 지키는 수호신 같은 나무다.
서울 은평구 은평 한옥마을은 종로구 북촌과 서촌에 이어 서울에서 세 번째로 큰 한옥 단지라고 한다. 북한산을 배경으로 눈 내린 한옥마을 풍경은 운치 있고 근사하다는 말로는 부족했다. 동네 아이들이 나와 조잘거리며 조막만한 손으로 열심히 눈사람을 만드는 모습이 참 귀엽다.
절 입구 ‘三角山 津寬寺’라고 새겨져 있는 현판은 북한산의 옛 이름 삼각산을 알게 해준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삼각산은 ‘백운봉 인수봉 만경봉 세 봉우리가 우뚝 솟아 세 개의 뿔과 같이 생겼다 해서 붙여졌다’고 나와 있다. 진관사는 들머리인 극락교 보다 다리 옆으로 나있는 계곡가를 걸어 들어가는 게 좋다. 청명한 물소리가 들려오는 눈 쌓인 하얀 계곡이 참 아름답다.
진관사는 10여명의 비구니(여승)들이 운영하는 절이라 그런지 더욱 정갈하고 평온한 분위기로 가득하다. 절 마당에 작은 초가집처럼 꾸민 찻집이 있어 쉬어가기 좋다. 불전이 있는 경내 안으로 들어서자 바깥세상과는 확연히 다른 질감의 공기가 느껴졌다. 대웅전이 보이는 댓돌에 앉아 고즈넉한 산사 풍경을 즐겼다. 평소보다 시간이 몇 배나 느리게 흐르는 듯했다. 진관사에서 북한산길이 이어져 있어 산행을 이어가도 된다.
경내에 있는 불전 가운데 산신, 무신 등 다양한 민간신앙의 신(神)들을 모시고 있는 칠성각은 좀 특별한 곳이다. 지난 2009년 5월 칠성각을 해체 보수하던 중 낡은 태극기와 독립운동사료들이 발견된 곳이다. 독립신문과 독립운동 사료들이 태극기에 싸여 있는 상태로 불단 안쪽 기둥사이에 수십 년간 숨겨져 있었던 거다. 정부는 총 6종 20점에 이르는 사료들을 서울시 등록문화재로 지정했다.
칠성각으로 들어가면 칠성신 그림 옆에 작게 축소된 옛 태극기가 숨겨진 것처럼 놓여 있다. 칠성신들이 태극기를 보호하고 있었던 게 아닐까 상상해 보았다. 더 놀라운 건 진관사 태극기는 일장기위에 덧그려졌다는 점이다. 일장기를 거부하는 마음, 일제에 대한 강한 저항의식이 느껴졌다.
삼각산 마루에 새벽빗 비쵤제 / 네 보앗냐 보아 그리던 태극기를
네가 보앗나냐 죽온줄 알앗던 우리 태극기를 오늘 다시 보앗네
자유의 바람에 태극기 날니네 / 이천만 동포야 만세를 불러라
다시 산 태극기를 위해 만세 만세 다시 산 대한국
- 진관사 칠성각에서 발견된 독립신문에 실린 <태극기> 시(詩) 가운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