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마포구 합정동 절두산
전국에 있는 많은 산 이름 가운데 가장 잊기 힘든 곳 가운데 하나가 ‘절두산’(서울시 마포구 합정동)이 아닐까싶다. 이름은 무시무시하지만 서울 도심 속에 한강을 바라보며 고즈넉하게 혹은 경건한 마음으로 산책하기 좋은 곳이다. 원래 산이 아닌 30m 정도의 아담한 봉우리로 본래 이름도 잠두봉(蠶頭峰)이었다. 조상들에게 실을 공급했던 벌레 누에의 머리 모양을 닮았다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
19세기 구한말 천주교 박해 때 많은 신자들이 이곳에서 처형을 당했는데, 당시의 참상을 지켜보던 민중들 사이에 전해 온 말이 '목을 자르다'라는 뜻의 '절두산(切頭山)'이다. 서학(西學)으로 불린 천주교는 ‘사학(邪學)’으로 몰리며 6년간이나 계속됐던 병인박해. 한국 천주교회사상 가장 혹독한 박해로 기록된다. 기록에 따르면 절두산에서 머리가 잘린 사학 죄인은 모두 1만여 명이나 된다. 김훈 작가는 이곳에서 영감을 받아 구한말 천주교를 다룬 역사소설 <흑산(黑山)>을 쓰기도 했다.
당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조선후기 실학자 정약용의 집안도 풍파를 맞는다. 장남 정약현은 집안을 지켰고, 셋째 정약종은 끝내 참수 당했다. <자산어보>를 남긴 둘째 정약전은 흑산도로 유배 가서 평생 물고기를 들여다보다 객사했고, 막내 정약용은 배교하고 동료 교인들을 효과적으로 잡는 방법까지 밀고해 18년간의 유배로 살아남았다.
한강이 지긋이 내려다보이는 잠두봉은 조선시대 겸재 정선(1676~1759)이 그림 <양화환도(楊花喚渡, 양화나루에서 배를 부르다)>에 담았던 아름다운 곳이었다. 바로 아래 있었던 양화진 나루터 주변은 잠두봉과 어울려 이름난 명승으로 많은 풍류객과 문인들이 뱃놀이를 즐기면서 시를 지었던 곳이기도 하다.
주변 조망과 해 저무는 강가의 노을 풍경이 참 좋아 우리나라에 온 명나라 사신들이 봉우리에 올라가 구경을 하면서 주변 경치가 중국의 적벽(赤壁)이나 다름없다고 감탄할만했다.
지금도 한강 산책로를 지나다보면 절로 눈길을 끄는 존재로 계절 마다 꼭 들르게 된다. 천주교 순교성지와 성당, 외국인 선교사 묘지공원 등을 품고 있어 구교와 신교의 성지를 함께 거니는 기분이 특별한 곳이다. 눈 내린 날 찾아가면 사각사각 눈 밞는 발소리가 들려올 정도로 조용하여 사색에 혹은 상념에 빠지기 좋다.
* 대중교통편 : 서울 전철 2·6호선 합정역 7번 출구에서 도보 10분
고요히 산책하고 기도하기 좋은 성지
1967년 절두산 성당, 순교기념관 등이 들어서면서 절두산 순교성지(사적 제399호)가 됐다. 여느 성당에서 볼 수 있는 전형적인 건축물이 아니라서 더욱 특별하게 느껴지는 곳이다. 봉우리 위로 보이는 원형모양의 절두산 성당 지붕은 선비의 갓을, 종탑은 순교자들의 목에 채워진 목 칼을 뜻한다고 한다. 한국적인 은유를 담으면서 순교의 정신도 담아내어, 세계 건축 설계 콘테스트 은상 수상을 받았다.
절두산 언덕배기 위 성당은 좀 특별하다. 천주교 성당하면 흔히 떠오르는 지붕이 뾰족한 고딕양식의 서양 건축물이 아니다. 한강변 산책로를 지나다보면 자연스러운 풍경의 품에 포근하게 안겨있는 성당의 모습이 눈길을 끌고 저절로 들어 가보게 된다. 눈 내린 겨울날엔 절두산의 절벽과 그 속에 자리한 성당 모습이 한 장의 그림엽서 같아 자꾸만 눈길과 발길이 머무는 곳이다.
절두산 순교성지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곳은 나무들이 우거진 한강변 오솔길이다. 소나무와 잣나무, 좀작살나무, 청단풍 등 여러 나무들이 촘촘히 서있는 산책길이 이어진다. 한가로이 거닐다 경쾌하게 들려오는 새들의 지저귐 소리를 듣다보면 마음이 한결 안온해진다. 길셮으로 내려다보이는 한강 물빛에 또 다시 고요한 마음의 평화를 담을 수도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옛 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전쟁과 독재 등 비극적인 사건들을 많이 겪다보니 맺힌 한이 많아서인가 종교심이 무척 깊다. 여의도에 세계 1위의 신도수를 가진 교회가 있을 정도며, 세계 10위안의 큰 교회 가운데 한국의 교회가 예닐곱 개나 된다. 신도들이 무릎을 꿇고 기도와 기원을 하며 어루만졌을 성자상의 두 손은 색깔이 다 벗겨지고 반들반들하다. 맞잡은 두 손을 보니 마음이 푸근해지고 '무언가를 믿는 순간 그 무언가에 속는 것'이라는 속된 내게도 새해에 빌고 싶은 게 떠올랐다.
종교는 따로 없지만 조용히 기도하고픈 마음이 드는 요즘이다. 기도는 하느님의 중계로 하는 자신과의 조용한 대화라고 한다. 절두산 성당은 미사시간이 아닐 때도 문을 열어놓아 홀로 앉아 기도하기 좋다. 성당 벽 한쪽에 '짐을 진 자들아 이리로 오라'는 팻말이 붙어 있다. 가진 짐은 없으나 없는 채로 앉아 눈을 감고 기도를 하고 기도 소리를 들었다.
부러 정식 미사 시간을 피해 예배당에 들어갔다. 가난한 사람, 슬퍼할 줄 아는 사람, 온유한 사람, 올바른 것을 위하다 힘들어진 사람··· 그런 사람들이 다 복을 받는다는 신부님들의 축원이 싫었다. 다 거짓말 같아서.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했던 선교사 묘지공원
성당 곁에 자리한 '양화진 선교사 묘원'은 1890년에 조성된 곳으로, 조선말 고종 때부터 한국을 위해 일한 종교계·교육계·언론계 등 150여명의 외국인 인사들이 잠들어 있다. 우리나라 공동묘지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 드는 건, 무덤마다 지키고 서있는 다양한 모양의 비석들 때문이다. 십자가 모양에서 네모반듯한 묘비가 있는가 하면 울퉁불퉁한 자연석처럼 생긴 것들도 있다. 눈이라도 내리면 묘지위로 하얀 눈이 이불처럼 쌓여서 무덤가의 분위기가 황량하지 않고 포근하게 느껴진다.
영국 특파원으로 내한했다가 항일언론투사가 된 분도 잠들어 있는데 바로 어니스트 베델이다. 1904년 한글, 영문판의 항일 민족지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하여 일본의 침략행위를 맹렬히 비판 규탄했다. 구한말 의병들의 인터뷰와 사진을 실은 것으로도 유명하다. 1908년 친일 미국인 스티븐스를 쏘아 죽인 전명운과 장인협의 거사를 찬양하는 보도를 낸 후 결국 일제에 의해 상하이로 추방을 당한다. 1년 후 돌아왔으나 그만 병이 나서 37세의 아까운 나이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나는 죽지만 <대한매일신보>는 영생케 하여 한국 동포를 구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호머 헐버트(1863~1949)는 조선 정부가 세운 최초의 근대교육기관인 육영공원의 초대 교사였다. 그는 수업을 위해 우리말을 배우다가 한글의 우수성에 매료되어 한글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배우기 쉬운 한글을 업신여기는 조선의 풍토를 안타까워한 그는 1891년 <사민필지(士民必知)>라는 국내최초 한글교과서를 만들었다. 세계 각국의 지리와 풍속을 한글로 기록한 것이다. 헐버트는 세 번이나 고종의 비밀특사로 활동하기도 하며 조선의 독립을 위해 투쟁했다.
특이하게도 '소다 가이치'라는 일본인 선교사의 무덤이 있어 눈길을 끌었다. 1905년부터 1945년 해방 때 까지 40년간 아내와 함께 한국 땅에 살면서 천여 명의 고아를 자식처럼 돌보았다. 1961년 한국으로 돌아와 일본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문화훈장을 받았고 다음 해 이곳에 묻혔다. 이외에도 아펜젤러, 언더우드 등 역사 교과에서 접했던 분들의 묘비가 이어진다.
안내판과 함께 자원봉사자들이 방문객과 함께 묘역을 돌며 상세히 설명을 해준다. 한국인보다 더 한국을 사랑했던 고인들의 삶이 비석에 새겨져 있어 찬찬히 들여다보게 된다.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보다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하노라', '나에게 천(千)의 생명이 주어진다 해도 그 모두를 한국에 바치리라' 등의 비문이 외국인이지만 한국을 사랑했던 이들의 애절함이 느껴졌다.
묘원 한쪽에 새겨져 있는 짧은 시 한 편이 긴 여운을 남긴다.
언 손 품어주고
쓰린 마음 만져 주니
일생을 길다 말고
거룩한 길 걸었어라
고향이 따로 있든가
마음 둔 곳이어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