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례 하동 섬진강
섬진강은 우리나라 5대강에 드는 긴 강이다. 국가하천(한강, 금강, 영산강, 낙동강 등) 가운데 수질이 가장 좋은 물줄기로 강변풍경 또한 제일 아름답다. 그러다보니 섬진강변 여행은 자전거, 도보여행을 좋아하는 이들의‘버킷 리스트’에 꼭 들어가는 곳이다. ‘내가 찍는 사진이 내가 지금 보고 있는 것보다 못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드는 풍경이 강을 따라 이어진다.
전라도와 경상도를 보듬으며 구불구불 흘러가는 섬진강은 임실, 곡성, 구례, 화개, 하동, 광양 등 많은 강변마을을 지난다. 이 가운데 전남 구례와 경남 하동 여행을 위해 열차를 타고 섬진강변의 작은 기차역 구례구역을 향해 떠났다.
* 자전거여행길 : 구례구역 - 구례시장(5일장) - 한국압화박물관 - 대나무숲길 - 하동송림 - 최참판댁 - 평사리 공원
섬진강변의 정겨운 장터 구례오일장
매년 3월 노란색 상큼한 꽃을 피우면서 봄이 왔음을 알려주는 산수유마을, 지리산 성삼재, 화엄사 등 명소가 많은 구례는 자전거 여행을 하기에도 좋을 정도로 큰 동네다. 특히 전북~전남~경남까지 이어지는 저마다 아름다운 풍경을 간직한 섬진강변길이 있어 자전거 여행자에게 고향 삼고 싶은 곳이다.
지붕에 기와를 인 아담한 구례구역에서 내려 바로 구례읍을 향해 자전거 페달을 밟았다. 구례시장에 5일마다 큰 시장이 열린다 (매 3일과 8일). 구례는 지리산 일대에서 봄소식이 가장 빠른 곳으로 장날이면 동네 전체가 북적거린다. 구례버스터미널 가까이에서부터 차도와 인도를 걸쳐서 구례읍 한가운데까지 장터가 넓게 펼쳐져 있다. 섬진강가에서 가장 큰 장터지 싶다.
과거 영호남 물물교류의 장소였다는 장터답게 없는 것이 없다. 철공소라는 간판을 단 대장간에서 ‘깡깡’ 경쾌한 망치질 소리가 들려오고, 여러 대의 까만 쇠통이 돌아가고 있는 뻥튀기 가게에선 내내 고소한 곡물냄새가 흘러나온다. 장날에만 나온다는 뻥튀기 주인장은 다른 장터와 달리 대부분 중년의 여성이라 좀 놀랐다. 수 십 년 경력의 뻥튀기 장수 아주머니는 곡물외에 말린 나물과 약재들도 능숙하게 튀겨낸다.
이웃동네 경남 하동 화개장터가 관광지 시장이라면, 구례시장은 지리산과 섬진강에 기대어 사는 사람들의 삶을 엿볼 수 있어 좋다. 장날에 만나 서로 반가운 인사를 나누는 주민들의 정답고 질펀한 사투리를 들다보면 슬며시 미소가 지어진다.
크고 오래된 장터답게 수구레 국밥, 다슬기 수제비, 팥칼국수, 육회비빔밥 등 TV에 나왔다는 맛집 식당들이 많다. ‘수구레’는 쇠가죽에서 벗겨낸 질긴 고기다. 정육점을 겸하고 있는 식당에서 육회비빔밥을 먹었다. 이런 곳을 ‘정육식당’이라고 하는데 고기도 신선하고 가격도 저렴해 좋다. 얼음조각을 넣은 식혜를 후식으로 주신다. 자전거타고 다니느라 배고프겠다며 새우로 국물을 낸 칼국수를 건네 주셨는데 배는 물론 마음까지 함께 불러왔다.
평소 만나기 힘든 다슬기 식당도 눈길을 끈다. 다슬기는 이름이 많다. 지역마다 올갱이, 고둥으로도 불린다. 다슬기는 섬진강 상류에 모여 사는데 신기하게 강 하류엔 재첩 조개가 많이 산다. 다슬기탕, 부침개, 무침, 백숙, 수제비, 칼국수 등등 다슬기로 할 수 있는 온갖 음식을 맛볼 수 있다.
꽃피는 봄날에 어울리는 압화 박물관
지리산 자락에 자리한 마을 전남 구례는 야생화의 천국이다. 지리산에는 국내 야생화 종류의 3분의 2가량인 1500여 종의 야생화가 자생하고 있다고 한다. 구례읍에는 온갖 꽃이 만발하는 요즘 같은 봄날과 잘 어울리는 압화 박물관(구례읍 동산1길 29)이 있다. 잠자리 생태관, 자연생태학습원 등이 함께 모여 있어 볼거리가 많다.
한옥 모양의 박물관에 들어서면 꽃을 말리고 눌러 만든 각종 작품들을 감상할 수 있다. 일본, 중국, 러시아 등 외국 작가들의 작품도 전시되어 있다. 압화는 꽃뿐만 아니라 잎, 줄기, 이끼, 나뭇잎, 나무껍질 등도 재료로 쓴다. 인간에게 자연의 아름다움을 선사하는 꽃이 다시 예술작품으로 탄생한다. 이곳은 국내 유일의 압화 전문 박물관으로, 방문객이 직접 압화 작품을 만들어볼 수 있는 체험 프로그램도 운영한다.
강변을 따라 화사한 벚꽃이 휘날리는 벚나무가 많은 섬진강. 구례시장에서 상인이자 동네 주민에게 섬진강 '대밭길'을 알게 됐다. 구례읍 원방리 강변 일대로 예전부터 대나무가 많았는데 정비를 해서 대나무숲 산책길로 조성했다.
강변을 따라 펼쳐진 울창한 나무들과 대나무숲은 아름다운 강변풍경과 함께 시원한 그늘을 드리워준다. 살랑이던 강바람도 대나무숲에 닿으면 거칠고 원시적인 소리로 바뀐다. 대나무가 많아 지었다는 이 길의 이름이 재밌다. '죽죽빵빵길'이란다.
한갓진 ‘죽죽빵빵길’을 지나다보면 재밌는 이름의 새로 생긴 보행자용 다리가 나타난다. 섬진강을 건널 수 있는 두꺼비다리(구례군 문척면 죽마리)다. 옛날엔 강변에 두꺼비가 많이 살았는지 한자어 '섬(蟾)'은 두꺼비를 뜻한다.
섬진강이란 이름은 고려 우왕 시기에 지어진 것이라고 한다. 왜구가 섬진강 하구에 침입했을 때 수십만 마리의 두꺼비가 울어 왜구를 물리 쳤다는 전설이 있다. 다리 한가운데를 지나다보면 녹음된 두꺼비 노래소리가 자동으로 들려온다. 개구리, 맹꽁이와 함께 요즘 듣기 어려운 두꺼비 소리가 반가운 마음에 다리를 천천히 건너가게 된다.
화개장터를 지나 물반 모래반인 하동읍 섬진강가에 도착하니 강변을 따라 산책로가 잘 나있다. 산책로를 지나다보면 아름드리 나무들이 용트림을 하듯 꿈틀거리며 하늘을 향해 솟아 있는데 바로 하동 8경 중 하나라는 '하동 송림'이다. 조선 영조 (1745년)때 강바람과 모래 바람을 막으려고 조성한 소나무 숲인데, 지금은 이렇게 멋진 노송 숲이 되어 섬진강 백사장 옆에서 하동 주민의 편안한 휴식처가 돼 주고 있다.
정말 우람하고 장대한 노거수 나무들이 흐르는 강물 앞에 모여 있는 풍경이 믿음직스럽고 강 백사장과 어우러진 모습이 장관이다. 천연기념물(제445호)로 지정될 만 했다. 숲 보전을 위해 3년 주기로 개방과 폐쇄 지역을 번갈아 운영한다. 울창한 노송 숲과 맑은 섬진강, 강변 넓은 백사장이 어우러진 절경을 백사청송(白沙靑松)이라고 부른단다.
페달을 천천히 밟으며 하류 쪽 하동포구를 향해 백사청송 강변길을 여유롭게 달렸다. 송림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이 싱그럽다. 자전거를 타고 봄날의 섬진강가를 달려본 이들은 공감할 거다. 자신에게 두 다리가 있고, 자전거가 있고, 그것을 탈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자전거를 타다가 너무 힘들어 다리에 쥐가 날 만큼 힘들었던 길도 있었지만, 자전거를 타면서 너무 좋아 실성한 사람처럼 히죽히죽 웃음이 나오는 곳이 섬진강변이다.
하동읍 마을가의 섬진강은 곡성이나 구례에서 봤던 아담한 강이 아니다. 백사장의 풍성하고 고운 모래, 손톱만 한 조개 재첩들이 사는 넓고 맑은 강물... 바다와 강의 모습이 반반씩 들어 있다. 강물을 찍어 맛을 보면 짠맛이 날 것 같았다. 무엇보다 언제든 강가로 내려가 발을 담그며 몸을 식히고, 작은 조개 껍데기가 카펫처럼 깔린 강변에 앉아 쉬어 갈 수 있어서 좋았다.
하동의 대표 음식은 재첩이다. 강물에서 난다하여 주민들은 '갱조개'라 부른다. 섬진강에서 채취한 재첩은 두말할 필요 없는 하동의 명물이다. 입맛을 다시게 하는 뽀얀 국물이 우러나는 재첩국은 국물 내는 데 흔히 들어가는 된장이나 비법 육수가 필요 없다. 비법이라고 하면 재첩이라는 조개 뿐. 소금 간에 산뜻한 향을 내는 부추가 전부다. 의도했지만, 의도하지 않은듯 보이는 무위의 예술 같은 음식이다.
멈춘듯하기도 하고 흐르는 것 같기도 한 강물 위로 사람들이 모내기 하듯 허리를 숙이고 재첩을 잡는다. 긴 나무 막대 손잡이가 달린 '거랭이'와 쇠로 만든 굵은 체인 '아미', 그리고 플라스틱 소쿠리가 농사 도구다. 허리까지 잠기는 강물 속에 들어가 거랭이로 바닥을 긁어 모래와 함께 재첩을 건져 물에 띄워놓은 소쿠리에 담는다. 조리로 쌀을 이루듯 소쿠리로 강물을 일어서 모래는 버리고 재첩만 남긴다.
하동군 악양면 평사리는 섬진강이 주는 혜택을 한몸에 받은 땅이다. 박경리 작가의 대하소설 <토지>의 배경으로 문학관과 소설속의 마을이 재현되어 있는 유명한 관광지이기도 하다. 평사리 입구로 접어들면 소설 속 서희가 지키려고 했던 너른 들판이 나온다. '무딤이들'로 불리는 악양들판 사이 농로 길을 경운기의 속도로 산책했다.
무딤이들은 밀물 때 섬진강물이 역류하고 홍수가 나면 무시로 물이 드나들었다고 해서 붙여진 순 우리말 이름이다. 섬진강 오백리 물길 중 가장 너른 들을 자랑하는 무딤이들은 무려 83만여 평에 달한다. 옛날 걸인들이 평사리에 들어오면 1년은 걱정 없이 얻어먹고 지낼 수 있었다는 이야기가 그럴 듯했다.
관광지가 된 최참판댁 사랑채 대청 마루에 올라앉으니 평사리의 드넓은 들판이 한눈에 들어왔다. 솟을대문 밖으로 보이는 풍경이 예사롭지 않다. 평사리 들판이 한 눈에 펼쳐지고 부부 소나무가 손에 잡힐 듯 보였다. 대문 앞에서 뒷짐을 지고 악양들판을 보고 있자니 소설 <토지>에 나오는 만석꾼이라도 된 기분이다.
악양면 마을 이름이 좀 별나다 했더니, 경치가 너무 좋아 중국의 호남성 악양(岳陽)에 견줄만해서 지어진 이름이라고 한다. 악양면 사는 아이들은 눈이 마주쳐 손을 흔들면 같이 손을 흔들고 웃으며 '안녕하세요' 인사를 한다. 인생도 세상도 뭐 그리 나쁘지 않구나 싶은 생각이 드는 동네다.
캠핑장이 있는 평사리 공원을 들어서면 입을 동그랗게 말고 삐죽 고개를 내민 해학적인 표정의 장승 한 무리가 반긴다. 섬진강 둔치를 따라 조성돼 있는 강변공원. 섬진강의 맑은 물과 하얀 백사장이 햇살에 반사돼 눈이 부셨다. 야영장 앞에는 넓은 모래 벌과 맑고 깨끗한 섬진강이 흐르고 있고, 지리산과 백운산 등 주변의 풍광도 뛰어나다.
섬진강은 모래가 많아 다사강(多沙江), 사천(沙川), 모래가람 등으로도 불렸다. 560여 리(약 220km)에 이르는 섬진강에서도 모래가 가장 많은 곳은 경남 하동군 악양면 평사리다. 평사리 공원 앞 모래밭은 웬만한 해수욕장의 백사장보다도 넓다. 아이들과 함께 거닐고 뛰고 뒹굴기에 딱 좋겠다.
신발을 벗고 맨발로 강가로 들어가 모래에 다리를 파묻고 앉았다. 강물만큼 시원하고 부드러운 바람이 뺨을 스쳐지나갔다. 부지런히 페달질을 하느라 쌓였던 하루의 피로가 유유히 흐르는 강에 실려 저 멀리 바다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