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 그 후

그 사람을 잃는 건 나를 잃는 것 같았어

by Cactus


내가 그 사람과 헤어지고 나서도 친구로 지내고 싶었던 이유는 딱 하나야. 말하자면 음..나는 그 시절의 내모습을 잘 알고 있는 그 사람을 통해 '그 때의 나'를 잘 기억하고 싶었던 거지.



사람은 계속 변하잖아. 나도 마찬가지야. 계속 변해왔고, 앞으로도 계속 변해가겠지. 세상을 긍정적이고 열정적으로 바라보던 대학생 때의 나는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조금 소극적인 사람이 되었어. 앞으로 더 무뚝뚝하고 갇힌 사람이 될 지도 모르겠고.

나는 두려웠어. 내 반짝거리던 시절의 기억이 점차 희미해질까봐. 캠퍼스의 신선한 공기에 아침부터 들뜨던 하루, 작은 눈빛에도 심장이 떨리던 순간. 작은 일에도 너무 웃고 다녀서 사춘기 학생같다는 소리를 듣던 어느날, 사소한 말에도 크게 즐거워하고 서운해하던 풍부한 감성의 나. 그런 나의 모습 말이야.

조용한 국제관 강의실 맨 뒷자리에서 교수님과 동기들 몰래 손을 잡던 우리. 시험기간이 되면 초콜릿을 책상에 쌓아두고 먹던 나와, 부지런히 간식을 날라주던 너. 먼저 게임 내기를 걸었다가 지고 나서 분에 못이겨 울던 유치한 나. 과제를 한답시고 영화를 보러 갔다가 잠이 들어 헤드뱅잉을 하던 나. 너한테 건방지게 구는 사람때문에 화가 난다며 급기야는 울어버리던, 그래서 너를 당황하게 만든 나. 계절이 바뀔 때마다 한없이 설레서 다이어리에 지금의 감정을 듬뿍 써내려가던 나. 그 사람이 아니면 누가 이런 나를 잘 기억해줄까. 누가 '그 때 네가 얼마나 눈부셨는데.'라며 나도 모르던 내 모습을 이야기해줄까.



그 사람과 헤어져버리면 나는 나를 잃을 것 같았어. 오래오래 친구로 남아 가끔 내가 힘이 들 때면 그 때의 나를 상기시켜주는 사람이길 바랐으니까. 그 사람이 아니면 모르는 내 모습이 많잖아. 이 세상에서 오직 그 사람과 나만 알고 있던 순간들도. 그래서 나는 헤어짐이 이사람과의 영원한 이별을 의미하지는 않기를 간절히 바랐나봐.



그런데 그건 그냥 내 욕심일 뿐이더라. 그 이후 친구로 여러 차례 만났지만, 우리는 더이상 과거의 우리가 아니었어. 이미 서로 각자의 환경에 맞게 조금씩 변하고 있었으니까.

게다가 한때 연인이었던만큼 현재나 미래에 대해 자유롭게 이야기를 나눌 수도 없었어. 가령 지금 누구를 만나고 있고, 과거에 우린 서로 어떤 감정이었고, 우리가 이렇게나 좋은 추억이 있었고 하는 따위의, 친구들과 으레 나누는 이야기들. 그런 이야기를 쉽사리 꺼낼 수 없게 된거지. 때에 따라선 현재 만나고 있는 사람에게 괜히 미안해지기도 했어. 우리는 분명 친구인데 말이야. 암묵적인 금기 사항이 많아 편한 대화가 불가능해졌달까. 언젠가부터 우리는 친구로서도 만나지 않게 됐어. 아마 그 사람도 나와 비슷한 감정을 느꼈을 거야. 그냥.. 그렇게 됐어.



생각보다 잔인한 일이야. 소중했던 기억을 함께 공유할 사람이 영원히 사라져버리는 건 말이지. 이젠 나의 그 때를 떠올리며 힘을 불어넣어줄 사람이 없어. 나 혼자 그 때의 나를 기억해야 해. 기억하지 않으면 그 기억은 죽은 게 되어버리지. 하지만 어쩌겠어. 그렇다고 불편함을 감수하면서까지 오래 전에 헤어진 남자친구와 가짜 우정을 지켜갈 수는 없잖아. 안그래?



나는 술 한잔을 들이키며 말을 이어갔다. 무섭게도 여러 차례 이별을 겪으며 감정이 무뎌지기도 했어. 이별을 하면 내 마음과 기억 속에서 한 사람을 자동적으로 걷어내고, 본능적으로 그 때의 나를 스스로 기억하려 애쓰지. 참 씁쓸해.

그런데 언니, 그걸 인정하는 게 어른이 된다는 것 아닐까. 친구는 빤히 나를 바라봤다. 우리의 기억이 아니고 나의 기억이 되더라도, 혼자만 추억하게 되더라도 어쩔 수 없다는 걸 인정하는 거 말야. 그게 어른스러운 거 아닐까? 어쩔 수 없이 누군가와 계속해 헤어지는 게 인생이라면, 언니도 오빠를 영원히 놓아버리는 걸 슬퍼하거나 씁쓸해할 이유가 없어. 사람은 누구나 그렇게 살잖아.

예뻤던 시절을 기억하는 건 꼭 그 사람과 함께여야하는 건 아니야. 언니 마음속에서만 살아 숨쉬면 되는거지. 굳이 누군가와 함께 공유하지 않아도 추억은 그 자체로 아름다운 거잖아.



그런가. 나는 또 한 잔을 비웠다. 혼자 기억하고 조금씩 잊어가기엔 우리의 봄날이 너무나 아름다웠는데. 어른답게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게 맞는 일이란 걸 이제 나는 안다. 내 욕심을 위해 누군가를 억지로 붙잡을 일도 더이상은 없다. 전혀. 하지만 여전히 나의 마음은 허하다.

사랑에 대해 나는 언제나 어른스럽지 못하다. 이별도 그렇다.



- 2011년 어느 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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