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에도 예의가 필요하다
#서늘한 가을바람이 불었다.
나는 그 바람을 맞고 한동안 서있었다.
왜 갑자기 전화를 받지 않는지,
어떤 이유로 나와 만들었던 세상에서 감쪽같이 사라진건지.
단 한마디의 이유라도 듣고 싶어 무작정 찾아간 나를
그는 만나주지 않았다.
견고한 줄 알았던 우리의 세계는 어느 순간부터 금이 가고 비가 샜던 걸까?
나와 함께 웃던 언제부터의 표정이 거짓이었을까?
나의 어떤 점이 너를 이토록 먼 곳으로 숨어버리게 만들었을까?
나는 너에게 매순간 어떤 사람이었을까?
머릿속에서 수많은 질문들을 혼자 쓰고 혼자 지웠다.
허공 속에서 혼자 고민한들 답은 나오지 않았다.
나는 그가 아니고 그는 내가 알던 사람이 아니었기에.
오랜 시간동안 나에게 보여준 마음과 표정과 순간 그 어떤 한 조각에 대해서도, 나는 진실을 알 수 없게 되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잔인하고 비겁한 이별이었다.
그건 네 사정이고.
그는 편지를 던졌다. 아니 헤어진 마당에 무슨 편지야. 내가 이걸 읽을 의무는 없잖아. 서로 시간 낭비하지 말자.
그래도 나는 내 손으로 편지를 다시 잡을 수 없었다. 한 달 동안 진심을 담아 한글자 한글자 눌러적은 편지를 다시 갖고 돌아가는 것은 차마 생각지도 못한 전개였다.
헤어지고 난 뒤 보고싶을때마다, 생각날때마다 꾹 참고 눌러적은 마음. 미안하고 고마운 기억을 되새기며 정리한 마음.
편지는 누군가와의 이별이 서툴기만한 어린 나에게 마음 그 이상의 것이었다. 다시 들고갈 순 없었다.
읽지는 않아도 좋은데, 버려도 좋은데, 내가 너 생각하면서 쓴 거니까 지금 받아주기만 하면 안될까.
그는 나에게 웃으면서 말했다. 차라리 우리가 같이 있는 지금 네 손으로 편지를 버리라고. 그냥 그렇게 확인사살을 하자고.
결국 나는 그 사람이 보는 앞에서 편지를 버렸다. 마음이 아프다기보다는 쓰라렸다. 한때 좋아했던 사람이 고작 이정도의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도무지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이별.
두 사람이 정성스레 쌓아올린 비밀스럽고 따뜻한 세계를 세상에서 없던 일로 만들어버리는 일.
두 사람만 기억하는 반짝거리는 순간순간들이 그 빛을 잃는 일.
더이상 떠올려도 의미가 없는 일.
누군가의 세상 반쪽이 사라지는 일.
기억해서도 안 되는 일. 챙겨서도 안 되는 일. 세상에서 가장 가까웠던 사람이 거리를 스쳐지나가는 수많은 남들보다 더 멀어지는 일. 더이상 안부를 물어볼 수 없는 일. 상대의 목소리가 희미한 기억 속으로 사라지는 일.
그 자체로 견디기조차 힘든 이별인데, 홀로 두어도 아슬아슬한 아픔인데 더 할퀴어야 할까.
한때 나보다 사랑했던 사람을 더 때리고 부수고 흔들어야 할까.
내가 상처받지 않기 위해서 그 사랑을 더 비참하게 만들어야 할까.
이유가 없는 이별은 없다. 이별해야 하는 사람에게 이별은 온다.
상대를 아프게 하는 일이 도저히 피할 수 없는 것이라면 더이상의 상처는 주지 말기. 한 때 사랑했던 사람에 대한, 아니 누군가를 사랑했던 내 자신에 대한 예의를 지키기. 명확하지만 덜 아프게 상대를 배려하기.
이별.
이별에도 예의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