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eworld Oct 24. 2020

02. 임신 앞에선 경쟁자도 하나가 된다

 도도하기로 유명한 그녀는 회사에서 머리부터 발끝까지 강렬한 포스를 풍기고 다닌다.


 우선 나이가 비슷한 우리 부서 또래들 중 이 회사에 가장 오래 있어서인지, 다른 사람들 대비 직급 연차가 낮아서인지 누구에게도 쉽게 곁을 주지 않는다. 결혼과 출산을 꽤 오래 전에 겪은 만큼 제 일을 깔끔하게 처리한 후엔 어김없이 칼퇴근을 한다. 워라벨을 누구보다 잘 지키면서 야무지게 사는 셈이다. 누군가와 일로 의견이 충돌하면 계급장 떼고 자기 입장을 고수한다. 한마디도 지지 않는달까.

여러모로 참 쉽지 않고 대하기 어려운 사람이다. 후배인데도 불구하고 쉽게 차 한 잔 마시자고 말을 걸기도 애매한 존재. 관계가 아닌 일로만 대해야 하고 그 일조차 제대로 준비해서 맞붙어야 하는 존재. 쉽지 않은 경쟁자.


 자기 몸부터 잘 챙겨야 해요. 너무 스트레스 받지 말고.

그녀의 따뜻한 말 한 마디를 들은 건 뜻밖에도 회사 화장실에서였다. 과도한 태스크에 허우적거리며 주말 출근을 불사하던 어느날 나는 우연히 화장실에서 그녀와 마주쳤다. “임신 준비한다고 하지 않았나요? 그냥 요즘에 너무 일에 매달리시는 것 같아서. 아기 가질 준비하려면 무엇보다 내몸을 편안하게 해야 하거든요.” 그녀는 안쓰럽다는 듯 바라보며 말을 이어갔다. 자신도 회사 다니면서 임신 준비하던 기간이 정말 힘들었다고. 일욕심을 조금 내려놓고 자기 몸에 집중했더니 어느 순간 천사가 찾아왔다고.


“그러게요. 저도 좀 내려놓을까봐요. 요즘 생리주기도 틀어지고 여러모로 몸에 이상신호가 와서...” 나는 말끝을 흐렸다. 그러자 그녀는 절대 무리해선 안된다며, 이럴 게 아니라 따로 점심을 먹으면서 제대로 얘기하자며 식사 날짜를 잡기 시작했다. 절대 곁을 주지 않는 사람과의 점심 약속이라니. 낯가림하는 나, 도도의 극치인 그녀의 친분 아닌 친분은 그렇게 화장실에서 급 생겨났다.


함께한 점심시간은 즐거웠다. 그녀는 어떤 병원에서 어떤 선생님과 함께 임신을 준비했는지, 어떤 영양제를 챙겨먹었고, 어떤 노력 가운데서 아기가 생겼는지를 상세히 이야기해줬다. 나는 지금 고민되는 부분을 털어놓고 조언을 들었다. 그녀가 워라밸을 챙기고, 칼퇴근을 하고, 일할 때 강하게 나가는 건 결국 좋은 엄마가 되기 위한 노력이었다. 아기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내기 위한 노력. 알고 보면 그녀는 차갑기는커녕 다른 사람에게 먼저 손을 내미는 사람이었음을, 나는 이제야 알았다.




단 한번의 식사로 마음의 빗장을 풀 순 없다. 그래도 우리는 서서히 가까워지고 있다. 인생에서 같은 고민을 지나가기에 서로의 위로가 더없이 소중하다.

언젠가는 나도 그녀처럼 또다른 누군가에게 위로의 손길을 건넬 수 있을까. 두렵기만한 임신 준비지만, 멀게만 느껴졌던 경쟁자까지 하나로 만들어주기에 마음이 따스해진다.

매거진의 이전글 01. 임신 준비는 처음이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