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선희 Apr 27. 2023

어두웠는데 어둠이 물러간 이야기

사는 게 나쁘지 않은 것 같아.

라고 지호가 말했다. 나는 그 말이 너무 반가워서 하마터면 눈물이 날 뻔했다. 얼마 전 지호는 학교에서 친구와 싸웠고 그날보다 그다음 날의 얼굴이 더 어두웠다.

엄마, 나는 화가 자꾸 나. 화가 날 때는 참을 수가 없어.

화를 내는 나와 그렇지 않은 나는 다른 사람인 것 같아.

지호는 자기가 다른 친구들보다 화를 자주 낸다고 했다. 화를 참을 수 없다고 했다. 화를 참으려고 마스크를 잘게 찢었다고 했다. 주위에 친구들이 점점 줄어간다고 했다. 나는 무척 놀랐지만 너무 놀란 것처럼 보이지 않으려고 애썼다.

새벽에 깨서 지호의 말을 곰곰이 생각하다 보니 잠이 오지 않았다. 지호의 화는 어디서 왔을까, 어디서 시작된 걸까. 짐작만 할 수 있을 뿐 알 수 없어서 잠이 오지 않았다. 나의 짐작은 모두 슬프기만 했다.

병원엘 가야 하나, 지호의 혼잣말이 떠올라서 전등을 켜고 평촌 정신상담을 검색했다. 이게 맞는 걸까? 이럴 때 어떻게 하는 게 맞는 걸까? 대수롭지 않게 그럴 때도 있다고 넘겨야 맞는 걸까, 아니면 검사도 하고 상담도 다니면서 세심하게 살펴야 하는 걸까.


이런 순간들이 늘 벅찼다. 혼자 고민하고 결정해야 하는 것들이, 나의 결정이 지호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지 알 수 없어서 늘 어렵고 무섭다. 그럴 때마다 새벽이 너무 길다. 아침이 더디게 와서 싫다.


얼마 전 봄꽃이 너무 예뻐서 동네를 무작정 걷는데 봄의 하천에서도 누군가는 땅만 보며 아주 천천히 걸었다. 어떤 할머니는 정자에 앉아 우두커니 꽃잎이 떨어지는 걸 보고 있었다. 두 시간 가까이 동네를 돌아다니며 피어나는 연두, 떨어지는 꽃잎처럼 예쁜 걸 많이 보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꽃은 모두 사라지고 이상하게 그 두 사람이 제일 오래 기억에 남았다. 누군가의 떨군 고개, 허망한 얼굴 그런 것들이 잊히지 않는다. 지호는 그날 어떤 걸음걸이로 집까지 왔을까. 고개를 떨구고 땅만 보지 않았나, 꽃을 보고도 꽃을 보지 못하지는 않았나.

꽃을 보고도 꽃을 보지 못하면 어쩌나

사무실에 앉아 그런 생각을 하니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엄마가 모르는 지호의 어떤 마음까지 모두 사랑해.’라고 문자를 보냈다. 그런데도 불안해서 자리를 박차고 나가고 싶었다.


그런데 어젯밤, 지호가 말했다.

흘러가는 거라는 생각이 들어. 이런 일도 저런 일도 있는 거지 뭐. 시간이 지나면 이 일도 추억이 되겠지. 사는 게 나쁘지 않은 것 같아.

너무 반가워서 하마터면 눈물이 날 뻔했다. 우리는 불끈 방에 누워 조용히 오래 이야기를 나누었다. 지호의 마음에 움튼 봄이 빛났다.

벌써 두 시야. 자자.

우리는 자자는 말을 다섯 번도 넘게 했는데 그러다가도 말이 이어지고 또 이어져서 깔깔 웃었다.

오늘 지호와의 대화는 엄마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었어.

웃음 끝에 내가 말했다.

우왕!

지호는 우왕, 이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나는 세 시가 다 되어 겨우 잠이 들었다. 잠이 들면서도  방금 지나간 그 시간들이 좋아서 녹음을 해 둘 걸 후회했다.

우리가 나눈 말이 어디든 자유롭게 떠다니다 라일락 위에 앉았다가 목련 잎사귀에도 내려앉는 상상을 했다. 어두웠는데 어둠이 물러갔다. 흘러간 그 밤 우리의 말소리를 되감고 싶다.  

   

매거진의 이전글 한계라니 그게 뭐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