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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선희 May 09. 2023

잠이 오지 않았는데 잔 이야기

<산책자>, 로베르트 발저

잠이 오지 않아서 같은 플레이리스트를 세 번이나 들었다. 요즘 잠이 오지 않을 때마다 류이치 사카모토의 한 플레이리스트를 듣는데 중간 광고가 없어서 듣다 보면 스르르 잠이 들기도 해서. 어제는 류이치 사카모토도 소용이 없어서 나는 창문을 열었다 닫기도 하고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몇 번이나 자세를 고쳐 누웠다. 옆으로 누워서 몸을 웅크리면 보통은 잠이 오는데 라고 생각하며 뒤척였다.

모두 포기하고 침대 옆에 있는 책더미에 손을 뻗어 아무거나 골라 들었는데 로베르트 발저의 산책자였다. 아주 좋아하는 책은 아니었는데 요즘 다시 읽으니 예전보다 좋다.

그래도 큰 기대 없이 아무 페이지나 펼쳐 들고 읽는데, 좋았다. 이상하게 좋았다. 작가의 별 볼 일 없는 산책길을 따라가는데 어딘가 좋았어. 나는 묘하게 차분해지는 걸 느꼈다. 세 장을 읽고 머리맡 등을 끄고 다시 잠을 청했는데 책을 옆으로 밀어두지 않고 품에 꼭 안았다. 그랬더니 잠이 오는 것 같았다. 산책자가 나를 꿈으로 이끌어 주는 기분이 들었다. 발저의 걸음을 따라 본 적 없는 베를린의 오래된 골목을 내려다보며 깊은 잠에 빠지려고 했다. 그러다, 아주 깊은 잠에 빠지는 것에는 실패한 나는 다시 산책자를 펼쳐 들었다. 그런데, 펼쳐든 장의 마지막에서 너무 마음에 드는 문장을 보았다.


나는 저 문장이 너무 마음에 든 나머지 책장을 활짝 펼친 채로 품에 꼭 안았고 드디어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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