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정리를 위해서 읽다만 책들을 정리하다가 발견되어 다시 읽기 시작했다. 그런데 은근히 재미있어서 후딱 읽게 되었다. 왜 이런 책을 이토록 오래 방치했었던가.
여름 시골 평상에서 동네 할머니들이 나와서 이런저런 이야깃거리를 나누는 것 같은 유쾌한 분위기의 글이다.
누구네 집 자식은 최근에 취직을 했고, 뉘 집 강아지는 꼭 자기를 안 닮은 강아지를 몇 마리 낳았더라라는 식의 정겹고 재미있는 수다를 함께 나누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실제 이런 이야기가 나오는 건 아니다.)
때론 격하게 공감하는 얘기들로 가득한 할머니들의 이야기들처럼, 구수하고 재미있는 필체로 쓰여 있다.
"내 인생은 로맨틱 코미디", 지금은 절판되었다.
저자 노라 에프런은 미국의 시나리오 작가이자 영화감독이다.
그 유명한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의 시나리오를 썼고,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과 "유브 갓 메일"의 영화감독을 했다고 한다.
삶에 대한 통찰과 해학이 담긴 그녀의 글은 소소한 먹을거리 재료로도풍성한 만찬이 되어 나오는 것 같은 풍요로운 표현력을 선보인다. 읽으면서 피식피식 웃게 되는 유머러스한 글솜씨가 부러웠다.
같은 말, 같은 주제라도 어쩜 그토록 다양한 표현을 늘어놓을 수 있을까.
같이 대화를 나누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박장대소 몇 번을 했을 것 같다.
나이 들수록 늙어가는 목주름, 정리안 된 핸드백 속 풍경, 아파트와 사랑에 빠진 이야기, 남편과 바람난 여자의 남편을 만나 길거리에서 껴안고 통곡하는 동시에 그 상황을 코미디 소재로 떠올리는 그녀의 엉뚱함, 케네디 대통령 재임 시절 백악관에서 근무한 젊은 여자 중 대통령이 추파를 던지지 않은 유일한 여자가 본인이고 그건 뽀글뽀글 파마머리 때문이라고 고백하는 그녀의 귀여운 생각들을 그 특유의 위트와 풍자로 표현하여 재미있게 글을 써 내려간다.
밀물처럼 쭉 밀려가서 넓은 갯벌을 만든 후, 썰물이 되어 오는 저 풍성한 파도처럼 그의 글 또한 그렇게 흘러갔다가 잔잔한 여운으로 돌아온다.
독서에 대한 단상, 심해지는 노안, 세 번의 이혼, 사랑하는 친구들이 병들고 심지어 세상을 떠나가는 그런 이야기들도 심각하지 않게 톡톡 튀는 문장으로 공감을 가게 하는 매력이 있다. 이런 해학과 유쾌함이 좋다.
"미리 알았더라면 좋았을 것들,
- 사람은 본성은 변하지 않는다.
- 사라. 빌리지 말고.
- 이혼하고 싶지 않은 사람하고는 절대
결혼하지 마라.
- 소파는 베이지 계열이 최고다.
- 밤 11시 이후에 전화하는 사람하고는
친구가 될 수 없다.
-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베이비시터라고
해도 2년 6개월을 버티면 끝장난다.
- 세상일은 아무도 모른다.
- 35살에 신통치 않다고 생각한 몸도
45살에는 그리워진다.
- 55살이 되면 뼈를 추릴 수 있을 것처럼
마른 사람도 뱃살이 늘어진다.
- 늘어진 뱃살이 뒤에서 보면 한결
적나라해서 옷장에 있는 옷들, 특히 하얀
티셔츠를 입어야 할지 고심하게 될 것이다.
- 모든 것을 기록하라.
- 일기를 써라.
- 사진을 더 많이 찍어라.
- 빈 둥지는 생각처럼 절망적이지 않다.
- 디저트를 하나만 먹으라는 법은 없다.
- 아이들이 10대가 되면 개를 한 마리
키워라. 최소한 나를 보고 반가워하는
존재가 하나는 생기는 샘이다.
- 세상에 비밀이란 없다.
- 파이 껍질까지 손수 만들 필요는 없다.
- 한밤중에 잠에서 깬다면 술이 과했다는
증거다.
- 팁은 항상 넉넉하게.
- 옷장에 있는 옷 가운데 3분의 1만 마음에
들지 않아도 성공한 것이다.
- 세상에 비밀이란 없다.
(본문 중에서)"
이런 짧은 본인만의 지침들도 자연스럽다.
그녀는 이렇게 무겁지 않은 이야기로 자신을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표현한다.
나이가 드는 것에 대해 사람들은 경륜이 쌓이고 나름 성숙해지는 것이라고 얘기하곤 한다.그렇게 나이 드는 것에 대해 미화를 하지만, 여자로서 나이 먹는 일이 어떻게마음편한 일인가.
노라 에프런은 나이가 들고 노화가 오는 것을 서글픈 일이라는 사실을 솔직하게 인정한다.
그것도 그녀의 낙관적인 태도로 '칙칙하지 않게.'
"난 명랑하고 극단적인 낙천주의자다. 하지만 솔직히 털어놓자면, 60살이 넘기는 건 정말 슬픈 일이다. 사방에 긴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친구들이 죽거나 병에 시달린다.
우울함이란 독기가 냉엄한 현실을 직시하도록 당신을 사정없이 몰아붙인다. 당신의 삶이 그동안 얼마나 행복하고 성공적이었든 크고 작은 실망과 실수로 가득 차 있다는 현실을 일깨우면서....(중략)
난 아무것도 후회하지 않는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결국 내가 저지른 실수들은 대부분 그럭저럭 넘어갔거나 웃긴 이야기로 만들어버렸거나 아니면 가끔 그 실수 덕분에 돈을 벌기도 했으니까." (본문 중에서)
이런 솔직한 심정들을 써 내려간 부분마다 저자의 성격이나 생활철학들을 엿볼 수 있는 것 같다.
나이가 들어도 울상 짓거나 한탄하지 말고, 그냥 받아들이고 인생이 다 그렇지 하는 낙천적인 자세로 칙칙해지지 않으려는 저자의 생활들이 상상이 된다.
어렵지 않은 인생이 어디 있으랴.
마지막으로 이 책의 소감은 옮긴이의 글로 대신하고자 한다
"노년에 대한 에세이를 많이 읽었지만 노라 에프런처럼 솔직하고 유쾌하게 말하는 사람은 처음 봤다. 나이 드는 것도 싫고 목에 주름은 더 싫고 눈이 침침해지는 증상도 슬프고 사랑하는 친구들이 하나둘씩 곁을 떠나는 현실이 싫지만 어쩔 수 있나. 인생 별거 있나. 살아 있는 힘껏 웃어넘기면서 즐겁게 인생을 살다 가야지! 골치 아프게 노년의 지혜니 성찰이니 떠들어대지 말고 열심히 일하고 형편 되는 대로 미모 관리하면서 자신과 주변 사람들을 챙기며 살다가 때가 되면 안녕하고 가라는 것. 내겐 삶에 대한 그 어떤 메시지보다 유익한 충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