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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그 Oct 21. 2020

당신의 사랑을 지속가능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양달문학, 에세이

작년이었던가? 홀수년에 태어난 사람들이 건강검진 대상이라는 관리부 공지 메일을 받았다. 나는 1995년생. 미간이 구겨졌다. 신체검사라면 초등학생 때부터 싫었다. 몸무게를 잰다며 속옷을 뺀 모든 옷을 벗었던 초등학교 2학년, 그 양호실의 공기가 아직 잊히지 않는다. 그때는 수치심이었다면 지금은 두려움이다. 내 몸이 건강하지 않은 걸 알아 무섭다. 더디지만 노화는 시작되었다. 치아 구석구석이 썩고, 잇몸이 찬찬히 내려앉는다. 있는 줄도 몰랐던 허리가 아파 의자를 들썩이고, 안경을 거치지 않고는 아름다운 어떤 것도 선명히 볼 수 없다.

마음의 경우는 어떨까? 마음도 병들까? 몸과 같이 시간의 흐름대로 그러는 것일까? 생각한다. 어릴 적 읽었던 책들은 성장 스토리가 주를 이뤘고 주인공들처럼 나도 다양한 일을 겪으며 더 단단하고 강한 마음을 갖게 될 줄 알았다. 하지만 웬걸? 어떤 경험은 마음을 완전히 무너뜨리기도 했다. 그곳에 다시 무엇을 세우는 일은 그럼에도 가능했지만 무딘 구석이 자주 발견된다. 마음도 몸과 같이 노화하는 걸까.

옛날이야기를 하나 해볼까.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을 가방에 넣고 다녔던 시절의 이야기이다. 당시 만나던 애인(d)이 그 책을 읽기 시작했다는 걸 듣고 도서관에서 빌려왔던 책. 그 책을 탐독하진 않았지만 마음에 꽂힌 한 부분이 있었다. 어머니와의 사랑은 분리, 연인과의 사랑은 결합을 내재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어머니와의 사랑은 한계가 있다. 어떻게 해도 한 몸이었던 상태를 능가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반면 연인과의 사랑은 한계를 모른다. 한계가 없지는 않을 테지만 그 정도를 모르기에 자주 없다고 믿어버리는 것이다. 그 모호함에 나는 매료되었던 것 같다. 나는 d와 영원까지 갈 것이라고 믿었다. d가 아니었더라도 그랬을 것이다. 나는 외로웠으니까.

결과는? 폭망. d와 헤어지고 오랫동안 나는 영원은 물론 아무것도 믿을 수 없었다. 믿는 것이 없었으므로 마음이 비었고 아프게 잃은 것들에 대한 환상통만이 공간을 채웠다. 사랑이라고 믿었던 감정에 올인했던 에너지가 마음 바깥으로 줄줄 새어 나왔다. 보고만 있으려니 아까워 한 움큼을 쥐어보았다. 그해 가을에는 최고 학점을 찍었고 겨울에는 미뤘던 극 한 편을 써 무대에 올렸다. 봄이 시작될 무렵에는 운동을 시작했고 11kg을 감량했다. 몸에 생기가 돌기 시작하고 마음도 봄의 결을 따라 부드럽게 풀어졌다. 하지만 여전히 쓰린 구석이 있었다. 휴학을 했고 휴학한 김에 제주로 떠났다. 두 달 동안 제주에 살며 몸과 마음이 새로운 리듬을 찾은 것 같았다. 그게 나쁘지 않았다.

이제 정말 괜찮아졌나? 그런 생각을 한다면 아직 괜찮아지지 않은 것이다. 제주에서 돌아오고 나서도 반년 정도는 그런 생각을 했다. 그 사건의 원인을 찾아보기도 했다. 외로움이 시작이었다고 생각했다. 외로움 해소 욕구를 사랑과 결합시킨 게 문제의 핵심이고.

그때의 내 사랑을 지속 가능하게 했던 것 외로움이었다. 지금은? 내 사랑을 지속 가능하게 하는 데에 외로움의 기여가 하나도 없다고는 말하기 어려울 것 같다. 하지만 기억하고 있다. 마음이 완전히 무너지던 그 감각을. 그리고 알고 있다. 외로움으로 사람을 찾는 건 사랑이 아니라는 걸.

외로운 밤,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어 마음을 쏟아내는 일보다 점심 샐러드 도시락을 싸는 일이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지금 내 사랑을 지속하는 데 가장 많은 지분을 차지하고 있는 건 몸과 마음의 건강이다. 사랑이 어려워질 때면 먼저 몸과 마음을 살핀다.

몸이 그러하듯 마음도 낡은 구석이 늘어나고 있음을 알고 있다. 어떤 곳을 찔러도 팅-하고 손가락이 튕겨 나오던 때를 지나 이제 움푹 움푹 패이는 곳을 자주 발견한다. 하지만 마음의 공간은 물리의 법칙을 따르지 않으니 끝없이 넓혀나갈 수 있다고 믿고 있다. 광활한 마음을 가지고 오래도록 깊이 사랑하며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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