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무그 Feb 15. 2021

살아있다는 사치

[창작 일기] 청라언덕 답사


쓰고 있는 글: 희곡 / 연못에서(가제)

탈고 목표일: 2021년 3월 31일

창작 키워드: 복원, 재건, 복기, 기억, 보존, 연결

현재 진행 상황: #4. 까지 초고 완성, 후반부 사건 자료조사 중

앞으로 일정: 대구지하철 참사, 동일본 대지진 과거와 현재 자료 조사, 장소 답사, 관련 영화/다큐 정리



장소 답사 기록 / 청라언덕(대구광역시 중구 동산동) 


설 연휴 마지막 날(2월 14일) 07:00, 청라언덕에 도착했다. 대구에 가면 꼭 들려야지 했던 곳. 그 일정이 이렇게 늦어진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먼저 청라언덕은 관광지이고 나는 사람 많은 곳을 선호하지 않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 대구에서의 일정이 다소 바빴기 때문이다. 첫날은 집에 도착해 푸짐하게 저녁을 먹고 가족들과 보드게임을 하곤 늦게 잠들었다. 다음날은 느지막하게 일어나 밥을 먹고, 아빠랑 한바탕 싸우고 또 화해했다. 저녁에는 바이올린 교습소를 연 친구와 만나 새벽까지 이야기를 나눴다. 셋째 날에는 엄마와 등산을 다녀와 첫날의 루틴을 반복했다. 틈을 내려면 낼 수 있었지만 첫 번째 이유로 밝혔듯 사람이 많은 게 싫었다. 그리고 모든 일정을 마스크와 함께 했기에 피로했다. 이번 방문은 단순히 관광이 아닌 쓰고 있는 희곡 답사이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공간을 충분히 느끼고 내 마음속에 비슷한 장소를 만들어 그곳에 인물들을 두고 이야기를 들어야 했다.  


06:35, 집을 나섰는데 밤처럼 깜깜했다. 일출 시간을 검색해보니 07:15. 정류장에 가는 사이 저렇게 노을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승객이 몇 없는 버스에 앉아 고요한 바깥을 살폈다. 거리에는 사람들이 거의 없었고 그 많던 사람들이 지금 아마 자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드니 묘하게 마음이 편해졌다. 마치 토요일에 출근한 기분. 나만 있는 사무실은 천국이니까. 


10분 정도를 달려 동산의료원 앞에 내렸다. 한번 와본 적은 있지만 그땐 그냥 쓱 지나치는 수준이었기에, 이번에는 언덕 초입에 있는 표지판과 설명을 유심히 읽어보았다. 청라언덕은 옛날에 솔밭이 우거져 3.1. 운동을 했던 사람들이 경찰의 눈을 피하려 이동경로로 이용했다고 한다. 그래서 태극기가 그렇게 많았던 거구나.




이곳이 바로 내가 청라언덕에서 제일 인상 깊었던 계단(그래서 자연스럽게 극의 공간으로 튀어나왔고, 일단 나왔는데 내가 잘 몰라서 이렇게 답사까지 오게 된 것이었다.)

계단을 내려가며 태극기 종류가 두 가지인 것을 발견했다. 하나는 흔히 태극기 하면 떠오르는 새하얀 바탕에 건곤감리가 새겨진 모양이었고 하나는 피, 또는 흙빛으로 물든 태극기였다. 두 개의 국기가 교차로 걸려있었는데, 아마 과거를 기억하고 그것과 연결되고자 하는 마음으로 그렇게 설치된 것이 아닐까 했다.


근처에 있는 이상화 시인 고택으로 향하는 길의 보도. 고등학교 시절 저 시구를 참 좋아했었다.




답사를 마치고 기차역으로 가기 위해 중앙로역으로 갔다. 그곳 역시 아무도 없었고 웅웅 거리는 기계음만이 공간을 조금 채우고 있었다. 중앙로역은 2003년 2월 18일, 대구 지하철 참사가 있었던 곳이다. 지금도 그때 불탄 기둥을 유리관에 넣어 역 중앙에 설치해놓았다. 설치해놓은 것인지 원래 그곳에 있던 것을 제거하지 않은 것인지는 정확히 모르겠다. 그 기둥을 바라보는데 좀 전에 봤던 태극기가 떠올랐다. 태극기와 기둥이 복원하고 보존하려는 것은 무엇인지 궁금했다.


기둥에는 애도의 흔적들이 있었는데 그중 가장 크게 적혀있던 글자가 눈에 띄었다. 살아있는 게 사치스럽다고 글자는 말하고 있었다. 그 문구에 담겨있는 감정은 표면적으로는 죄책감으로 읽힌다. 그 감정에 대해 오래 생각해보려고 한다.


쓰고 있는 연극에서 '수오'라는 인물은 청라언덕의 계단에서 '언니'와 사진을 찍고 산책을 한다. 그러다 돌연 언니를 버리고 돌아선다. 수오는 수오의 그런 결정이 사치였다는 생각하고 있을까? 청라언덕을 빠져나온 수오가 중앙로역 기둥의 '살아있는 게 사치스럽다' 문구를 보았다면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 분노, 복수심, 허탈감 그런 표면적 감정 속에 죄책감이 있었을까. 그 사건으로부터 수년이 지난 연극의 현재 시점에서 수오는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을까? 그런 만남과 헤어짐의 시간이 아까웠다고 생각할까, 아니면 겪어야 했던 시간이었다고 생각할까. 수오의 마음이 궁금하다. 

작가의 이전글 당신의 사랑을 지속가능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