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은 비일상(非日常)
내가 지금 살고 있는 곳으로 이사온 지도 4년이 되어가고 있다. 신랑의 고향이자, 나의 외가집이 있는 도시. 만삭의 몸으로 둘째를 낳기 전 이사를 준비하면서 나는 아이만을 위해 살기로 했었다. 일을 하면서 아이를 챙기기가 힘든데다 아이가 아프다고 생각하니 당장 일을 관두고 아이만을 위해서 살고 싶었다. 그렇게 휴직을 하고 이사를 해서 둘째를 낳고 새로운 마음으로 아이에게 헌신하면서 살겠다고 다짐했다.
일단은 언어치료를 시작했고, 그 다음은 무엇을 할 지 고민했지만 사실 그때나 지금이나 명확히 해야할 일은 없었다. 수영을 보내고 싶었지만 아직은 어려 조금있다 해야지 생각만 해두었다. 그리고 아무 증상 없는 아이를 데리고 전투적으로 물리치료나 수치료를 하기에는 무리가 있으니, 딱히 해야 할 일이 없었다.
둘째가 태어나고 아이 둘을 돌보며 네 가족 시간 보내며 그렇게 하루하루 보냈다. 꽤나 행복했던 일상들이었다. 그러다 2019년 겨울이었나, 어느날 소아과에 중국을 다녀온 사람은 미리 말해달라는 안내문구가 안내데스크에 있었다. 무슨 일이지? 잠시 생각할 뿐 별로 대수롭지 않게 지나갔다. 그러고 한 달 정도 지나고 점점 사태가 심각해지고 있었다. 그렇게 2020년 초, 나는 한 달 간 아이 둘과 셋이서 은둔 생활을 했다. 장은 쿠팡으로 보고, 가끔 힘겨운 날은 배달을 시켜먹고, 또 가끔은 야식도 시켜 먹으며 현관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서지 않았다. 집에만 아이 둘과 있다보니 마침 때가 맞은 건지 조금씩 무기력해졌다. 하지 않아도 될 생각으로 걱정만 늘어가니 우울한 감정을 자주 느꼈다.
결국은 어느 정도 적응이 되고부터 첫째는 어린이집으로 갔다. 그리고 버티고 버티다 둘째도 3월에 예정이었던 어린이집 입학을 5월 쯤에 감행했다. 바깥 공기가 퍽 따뜻해져있었다. 그런데 아이들이 있으나 없으나 나는 쇼파와 한 몸이 되어 아이들이 없는 시간을 아무것도 하지않고 누워만 있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하원 시간에 맞추어 아이들을 데리러 갔다가 함께 반찬가게에 들러 반찬을 몇 가지 사고 겨우겨우 밥을 먹이고 또 누워서 남편을 기다렸다. 코로나 블루였을까. 하지만 나는 단순히 코로나 때문만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산책을 하고, 책을 읽고, 몸을 일으켜 움직이며 일상을 찾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지만 그 노력이 무색하게 점점 우울함만이 남아있었다.
나는 결국 아이만을 위해 살 수 없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내가 결심한 것은 일단 일을 다시 시작하는 것이었다. 역시나 일을 하기 시작하자 바로 효과가 나타났다. 나의 존재를 부정한 채로, 아이만을 위해 산다는 것은 아이도, 나도 행복하지 않은 방법이었다. 나는 내가 포기한 것들을 아이를 위해서라는 말로 애써 위로하며 아직 어린 아이에게 짐을 지우고 있었던 것 같다. 어쩌면, 일을 하는 지금도 현실에서 도망친 게 아닐까, 아이를 위해서 지금 당장 무언가를 해야만 하지 않을까 생각이 나의 머릿 속을 괴롭히기도 한다. 그런데 나는 엄마이긴 하지만 전지전능한 존재가 아님을 인정해야만 했다. 아이가 말이 느리다는 말에 내가 언어치료 선생님이 되어야 할 것 같았고, 아이를 위해 수치료를 해주고 싶어 물리치료 전문대라도 들어가야하나 하는 생각을 했었다. 이대로라면 내가 약학 공부를 해서 신약을 발명해야겠다고 해야할 판이다. 이제는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없음을 인정하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한다. 엄마이자, 나 자신으로 살기 위해서, 아이를 위해서 포기한다는 말은 변명일 뿐이다. 그렇게 일을 다시 시작한지 2년여가 되어가고 있다. 부정적인 생각을 할 시간이 없기 때문인지, 규칙적인 생활을 하며 사회에 나갔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지만 전보다는 우울을 느끼지 않고, 무기력을 극복하였다. 언젠가는 내가 온전히 아이를 돌보며 이리 뛰고 저리 뛰어야 할 순간이 올 지도 모른다. 아이를 데리고 학교를 가고, 물리치료를 위해 병원을 순회하고, 정기검진을 다니는 생활을 해야만 할 때가 올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그건 그때 생각하기로 하고 지금은 일단 나로 살아보자. 가끔은 비일상이지만, 그럼에도 우리의 일상을 살아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