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서울의 모습은 빠르게 변하고 있었습니다. 청계천변, 세운상가 일대 같은 도심 판자촌은 도시 미관을 해친다는 이유로 철거되었고, 그 자리는 새 건물과 곧은 도로로 채워졌습니다. 거리는 점점 말끔해졌지만, 그곳에 살던 사람들은 하루아침에 갈 곳을 잃고 말았죠. 쫓겨난 이들은 철거의 손길이 쉽게 닿지 않는 산등성이로 올라갔고, 그 위에 하나둘 판잣집이 들어서면서 ‘달동네’가 만들어졌던 거예요.
당시 도시로 향하는 사람들은 폭발적으로 늘고 있었습니다. 1970년만 해도 전체 인구의 46%가 농업에 종사했지만, 10년 뒤에는 29%로 줄었죠. 도시로 온 이들 대부분은 당장 정착할 곳이 없었고, 그나마 값싼 땅으로 여겨진 산 위가 유일한 대안이었어요. 수도도,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가파른 언덕에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던 모습은 당시 서울의 풍경이었습니다.
달동네는 한국 산업화 과정의 또 다른 얼굴이었습니다. 낮에는 공장으로 출근하고, 밤에는 판잣집으로 돌아오는 이들의 삶은 ‘한강의 기적’ 뒤편에 드리워진 그림자였죠. 언론은 종종 달동네를 ‘도시의 흉터’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가장 치열하게 삶을 일궈낸 공간이기도 했어요. 아이들은 좁은 골목을 놀이터 삼아 뛰어놀았고, 어른들은 품앗이로 서로의 집을 고쳐주며 버텼습니다.
1980년에는 동양방송(TBC)의 드라마 〈달동네〉가 방영되면서, 이 말이 전국적으로 퍼졌습니다. 비록 가난했지만 따뜻한 정과 웃음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서민들의 이야기는 시청률 60%에 육박할 만큼 큰 인기를 끌었죠. 그때부터 ‘달동네’는 방송을 타고 대중적 이름이 되었고, 이후 고지대 서민 주거지를 일컫는 일반 명사가 되었습니다. (‘달동네’라는 표현을 처음 만든 사람은 통일운동가 백기완 선생이라고 전해진다)
달동네는 힘겨운 현실 속에서도 서로를 보듬으며 살아가던 곳이었습니다. 물을 길어 나르며 양동이를 들어주던 이웃, 비 새는 지붕 아래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던 아이들, 작은 텃밭을 가꾸며 하루하루를 살아내던 가족들. 국가는 그들을 외면했지만, 그들만의 공동체는 분명히 존재했어요.
하지만 시간이 흐르자 그 산등성이도 금싸라기 땅이 되었습니다. 달동네는 재개발 대상이 되었고, 그 자리에는 대단지 아파트가 들어섰죠. 옛 기억은 철거와 함께 사라졌고, 지금 서울의 산 위에 아파트 단지가 있다면, 그곳은 어쩌면 달동네였던 자리일지도 모릅니다. 아직 중계동 백사마을, 홍제동 개미마을, 창신동, 아현동, 그리고 재개발이 예정된 한남동 일부에는 달동네의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