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F 외환위기
1997년에 한국은 아시아 금융위기의 한복판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위기의 씨앗은 이미 김영삼 정부 시절에 뿌려졌죠. 정부는 ‘세계화’와 ‘선진국 진입’을 내세우며 1996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Organization for Economic Co-operation and Development)에 가입했고, 자본시장을 개방했습니다. 외국 자본은 활발히 유입되었지만, 기업들은 그것을 연구개발이나 혁신보다 무리한 확장에 쏟아부었어요. 결국 부채는 눈덩이처럼 불어났습니다.
그러던 중 태국 바트화 폭락을 시작으로 아시아 전역이 요동쳤습니다. 환율과 금리가 급등하자 한국 경제도 큰 충격을 받으며 무너져 내렸죠. 대기업들이 줄줄이 쓰러지고 은행들마저 위기에 빠졌습니다. 결국 정부는 국제통화기금(IMF: International Monetary Fund)에 구제금융을 요청할 수밖에 없었고, 한국 사회는 거대한 전환점 앞에 서게 된 것이었습니다.
IMF는 혹독한 구조조정을 요구했습니다. 기업들은 대규모 정리해고에 나섰고, 평생직장이라는 개념은 순식간에 사라졌습니다. 많은 이들이 안정된 일자리 대신 불안정한 비정규직으로 내몰렸고, 고용 구조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가치관과 공동체 의식도 바뀌어가기 시작했죠.
2001년에 한 신용카드 회사가 내보낸 광고는 시대의 분위기를 단적으로 드러냈습니다.
“여러분~, 모두 부~자 되세요~.”
따뜻한 덕담처럼 들리지만, 그 속에는 새로운 메시지가 숨어 있었습니다. ‘지금 당신이 부자가 아니라면, 어딘가 잘못된 것이다.’ 이때부터 한국 사회는 집단적으로 ‘부자가 되어야 한다’는 강박에 빠져들었어요. 돈은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 되었고, 사람들은 서로의 삶을 응원하기보다 끝없는 비교와 경쟁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성공은 곧 돈, 행복은 소비, 인간의 가치는 소득이라는 공식을 받아들이기 시작한 거예요.
우리가 흔히 말하는 ‘천민자본주의’가 이때 강하게 뿌리내렸습니다. 눈앞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태도, 거래가 인간관계의 기본 단위가 되는 문화가 퍼져 나갔습니다. ‘함께 살아야 한다’는 생각은 뒷전으로 밀려났고, ‘나만 잘되면 된다’는 태도가 일상의 기본값처럼 여겨지게 되었죠. 공동체는 서서히 해체되었고, 아이들은 ‘좋은 대학–좋은 직장–높은 연봉’이라는 공식을 인생 목표로 삼게 되었습니다. 도시의 공기 역시 점점 더 차가워졌습니다.
정부는 IMF의 요구에 따라 기업 구조조정을 실행했고, 기업들은 고용 유연성을 확보하기 위해 비정규직 고용을 제도적으로 확대했습니다. 이전까지는 예외적이었던 비정규직 고용이 이제는 기업 운영의 ‘정상 전략’으로 자리 잡은 것입니다. 1996년 43%였던 비정규직 비율은 위기 직후 50%를 넘어섰고, 이후에도 높은 수준을 유지했습니다.
정규직과 비정규직 사이의 격차는 점점 커졌습니다. 같은 노동자들 사이에서도 갈등이 생겼고, 기업은 이를 이용해 더 많은 비정규직을 고용했습니다. 통계청에 따르면 2023년 기준 전체 임금 근로자 중 약 37%가 비정규직이며, 그 수는 813만 명에 달했습니다. 비공식 노동까지 포함하면 그 규모는 훨씬 더 클 거예요.
결국 한국 사회에서 비정규직은 더 이상 위기의 부산물이 아니라, 위기 이후 ‘선택된 평범함’이 되어버렸습니다. IMF 외환위기는 사람들의 삶의 방식과 사회의 구조를 근본적으로 뒤흔든 사건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