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학기 기말 시험이 끝나고 회화과 1년 생활에 마침표를 찍었다. 편입학 원서를 내고 썼던 글을 찾아 읽어봤다. 나의 길을 찾는 것이 엄마의 역할과 아내의 역할을 잠시 내려 놓는 이기적인 결정이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막상 1년이란 시간이 지나고 그 과정을 돌아보니 난 엄마의 역할도 아내의 역할도 전보다 더 매끄럽게 해냈다. 아이들에게 지나치게 집중되는 에너지를 덜어 자기 개발에 투자했고 남편을 향한 쓸데없는 잔소리에 들이는 에너지를 더이상 허공에 쏟지 않게 됐다. 창고처럼 보이는내 작은 방에는 수채화 유화 붓글씨 붓들이 꽂혀 있는 병이 여럿이고 완성된 캔버스 부터 미완성인 것 그리고 아직 젯소칠도 되지 않은 생생한 캔버스까지 그야말로 그림 그리는 사람의 물건들이 곳곳에 즐비해 있다.
3학년 학부 공부를 하면서 질문의 가장 많은 부분은 나를 향해 있었다. 나를 가장 잘 보여줄 수 있는 사물은 무엇인가.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내면의 나를 표현해 보자. 자화상을 그려보자. 작품을 구상할 때 '나'를 벗어난 대상은 내면의 갈등을 일으켰고 쉽게 진도를 나갈 수 없는 상황에 놓이게 했다. 그 이유는 작가와 대상 사이에 거리가 너무 멀기 때문이었다. 촌에서 자란 내가 화려한 도시 생활에 익숙할 리 없었고 마음이 곱지 않은데 순수한 색으로 채색되지 않았다. 나의 주변으로 나의 내면으로 눈을 돌렸고 그제야 내것인 것들을 발견하기 시작했다. 왜 나는 불규칙적이고 너저분한 것에 끌리는가. 내 살아온 환경이 그러했고 규칙적이고 깔끔한 환경보다는 부조화스럽고 불규칙적인 자연 그대로 그러한 것들에 더욱 편안함을 느꼈다. 이것을 작품으로 끌어내지 않고는 세련된 구성과 색으로 완성된 작품은 바라지 말아야 겠다는 생각을 최근에 하게 된 것 같다. 그래서 더욱 거칠고 난잡스럽고 불규칙적인 것들을 찾아 관심을 돌리고 시선을 이동시키는지도 모르겠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있다. 더 나아가 본 것 만큼 생각도 확장될 수 있고 자유로울 수 있다는 걸 새삼 깨닫는다.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한 두려움은 시시때때로 일어나며 본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은 큰 차이를 만들어 낸다는 걸 아주 조금이지만 알 수 있었다. 아무리 창의적 기질을 타고난 사람이라 해도 남의 것을 보려하지 않고 밖으로 나오려 하지 않는다면 그의 세계는 자신에 갇혀 있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어쩌면 공부는 보는 것에서 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닌가 말이다. 생각하는 건 보는 것에 선행하지 않는다. 생각이 자유롭지 못한 것은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본다는 건 생각을 확장시키는 데도 생각의 깊이를 깊게 하는 데도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매 수업 시간마다 등장하는 미술사에 대한 이야기며 현대미술의 동시대 작가들의 이야기며 보고 듣는 것이 많아질수록 정보의 양에 비례해 생각도 복잡해 질 것 같았지만 정반대였다. 더욱 명확해 지고 방향에 대한 끊임없는 고민을 하게 만드니 그것만으로도 보는 것을 멈추면 안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거다.
1년 공부로 큰 변화가 있을 리 없다. 다만 두가지에 대한 믿음이 조금 더 강해졌다. 공부와 시간은 나를 배신하지 않을 것이다. 시간을 허투루 쓰지 않았다. 걱정만으로 시간이 흘러가게 놔두지 않았다. 그림에 대한 고민의 시간이 1년 다르고 2년 다르고 그 다음해가 다를 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고작 1년으로 그림을 가지고 놀 수 있는 나의 지평이 아주 조금 넓어진 것 같아서 감회가 새롭다. 재료를 다룰 수 있게 됐고 작품을 구상할 수 있게 됐고 표현할 수 있게 되기까지 시간의 레이어가 엄청 쌓여야 함을 부인하지 않겠다. 그것을 뛰어넘어 가려는 오만과 자만심에 자리를 내어주지 않겠다. 그리고 엄마와 아내의 역할과 분리해서 나 자신만의 성공을 누리지 않겠다. 엄마로 아내로 살아가는 지금이 내가 성장할 수 있는 적기라 생각하며 지금 이 순간을 어느 역할에서든 놓치지 않도록 노력해야 겠구나 생각하게 된다.
나 자신을 위한 투자와 고민의 시간들이 나를 본연의 자리로 돌려 놓았다. 나쁘지 않다. 전의 나와 지금의 나는 같지 않으니까... 누가 뭐래도 난 그림 그리는 사람이니까. 누가 뭐래도 난 글을 쓰는 사람이니까 괜찮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