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적 욕구의 끝은 어디인가. 기대와 계획 그리고 알 수 없는 외로움으로 가득했던 새해 첫날을 지나 어느새 5일이 되었다. 주로 이용하는 온라인 서점 알라딘 앱에 접속해 지난해 장바구니에 담아두고 결제하지 못했던 책 목록을 훑어봤다. 조선시대 천재 작가들에 대한 이야기며 영화를 통해 보는 심리학이며 글쓰는 여인들에 대한 이야기며 설흔 작가의 재미있는 글쓰기 책들이 위에 있다. 그리고 또 무슨 책들이 이어지나. 기록, 쓰기, 욕구, 드로잉, 산문집, 그림 그리고 고미숙 작가님의 읽고 쓴다는 것의 통쾌함... 이어지는 고전 목록들. 산발적으로 일어나는 나의 관심은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고 겉도는 내 삶의 모습과 너무도 닮아 있다. 나쁘지 않지만 외롭다. 우습다. 관심조차도 구속받고 싶은 나의 모순이.
집에 있는 검정 고무신을 가져다주며 바꿔 먹었다는 엿가락. 새해부터 미친 듯이 읽을 책을 서핑하는 내 모습에 놀라서 장바구니를 비울까 생각도 해봤다. 하지만 이런 기록이라도 남아 있어야 나의 산발적 관심을 추적해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냥 둔다. 책에 대한 소유욕은 끝이 없다. 잠시 내려놓고 도서관 검색을 시도한다. 아이들 읽히려 빌려온 그림책들을 도서관에 갈 때마다 두어개씩 가져가 나의 책으로 바꿔온다. 검정 고무신을 엿으로 바꿔 먹듯. 그렇게.
몽테뉴 <수상록> 선집을 읽은 후 누군가에 의해 선별된 조금 더 두꺼운 선집을 집어 들었다. 나이 듦과 죽음에 대한 이야기 말고 다른 사유를 엿보고 싶어졌다. 어렵게 읽히는 부분들이 없지 않다. 하지만 그것 또한 재미라 여기며 조금씩 맛나게 씹을 생각이다. 꼬맹이를 어린이집에 바래다주고 아들과 아침 일찍부터 도서관을 찾았다. 아들은 오랜만에 어린이 열람실에 앉아서 그림책 책장 사이를 오가며 재미있는 그림책을 골라 읽는 재미를 느끼고 있다. 나는 고무신을 엿으로 바꾸러 3층으로 올라갔다. 오늘은 수전 손택의 책을 검색했다. 문득 그녀의 삶이 궁금했다. 어려운 책 말고 그녀의 일기를 엮은 <다시 태어나다>를 빌렸다. 그녀와의 인터뷰를 옮긴 <수전 손택의 말>도. 끝장나는 명쾌함으로 알려진 그녀의 글솜씨는 일기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하지만 일기에는 그녀의 모든 감정이 그대로 살아 있어서... 일기를 쓰면서도 다시 읽을 그날의 내가 일기를 쓴 그날의 감정을 이해할 수 없을 만큼 수치스럽고 환멸을 느낄 수 있다는 부분을 감안할 때 빼는 부분도 있었던 기억에 의존한다면 그녀의 일기는 그 모든 것이 그대로 담겨 있다.
우종영 작가의 <나는 나무에게 인생을 배웠다>를 큰 글씨 판으로 빌리게 됐다. 내가 그린 그림에 '나무'가 많이 등장한다는 어느 글동무의 댓글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순전히 그것에 기인해 선택한 책은 아니지만 생각해 보면 드로잉 과제를 할 때도, 그리고자 하는 대상을 생각할 때도, 산책을 하는 중에 만나는 대상을 바라볼 때도 상당수 '나무'가 가까이 있었고 또 그것을 관찰했기에 이참에 '나무'와 '나'는 어떤 관계에 놓일 수 있는지 생각해 보기로 한 것이다. 고향집 뒷마당에 나의 그네가 되어 준 오래된 밤나무를 떠올려도 보고 아들을 낳았을 때 탄생목으로 심었던 소나무가 떠오르기도 하고 아빠를 닮았다 생각했던 개울 너무 빛을 내는 나무도 생생하게 떠올랐다. 흔하디흔한 게 나무인데 특별할 건 없다. 다만 '의미'를 구체화시켜 보기로 했다. 객관적 사물은 '의미'를 만날 때 특별해지니까.
2021년 밖으로 돌던 정신을 안으로 집중할 수 있게 도와준 '알아차림'에 대해 좀 더 알고 싶어 조셉 골드스타인의 <통찰명상>을 큰 글씨 판으로 빌렸다. 오작가의 <진짜 좋은거>를 통해 나에게 진짜 좋은 것이 무엇인지 그 무엇을 안다는 게 나를 어떻게 변화시키는지 맛을 본 후 명상, 수행, 마음 챙김, 알아차림 등의 단어에 눈길이 가기 시작했다. 리마인드 없이 만났다 사라지는 참 좋은 지식들이 얼마나 많은지... 만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지식을 나의 정신에 앉힐 수 있으려면 자꾸 찾아보고 공부하며 리마인드를 시켜줘야 한다는 걸 알겠다.
책 하나도 제대로 못 읽는 내가 왜 이렇게 많은 책을 한꺼번에 펼쳐 놓고 있을까. 스타일. 정신이 산만한 나만의 독서 방법이다. 읽고 싶을 때 언제든 이어서 읽으며 지식은 통한다는 전제하에 마구 쑤셔 넣다 보면 어느새 자유롭게 춤을 추고 있는 맥락을 만난다. 모든 지식이 내게 양식이 될 순 없다. 다만 미친 듯이 먹고 싶을 때 이 순간을 놓치지 말고 활용해야 한다. 안 그러면 도서관에 가는 재미를 잃어버릴 수 있다. 개똥철학이다. 아들은 나를 괴짜 엄마라고 생각할 것 같다. 아들과의 대화에도 단순 무식하게 장착시킨 지식을 휘두르며 맛깔나게 말하려 노력하는 엄마가 무척 신기하게 느껴지겠다. 개똥철학에 내 멋대로 사는 방식이다. 이런 재미가 없으면 난 지금을 버티지 못할 것이다.
수북이 쌓인 책들을 보면서 왜 이렇게 책을 보는지 나름의 이유가 필요해 몇자 적어봤다.
#개똥철학이라도가져야겠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