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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내가 왜 널 만나줘야 하냐고

서툰 마음의 끝에서

by 손린

(최나은 시점)


봄이 오기 전이었다.
그와 나 사이의 공기는 미묘했다.
가끔 연락을 주고받았지만,
그의 말투는 조금씩 달라지고 있었다.


나는 여전히 그가 좋았다.
하지만 그 마음을 표현하기엔 자신이 없었다.
그때의 나는,
아직도 ‘좋은 사람’이고 싶었으니까.


그는 대기업에 합격했다고 했다.
목소리는 단단했고, 자신감이 묻어났다.


나는 그가 자랑스러웠다.
그리고 내 소식도 전했다.
작은 무역회사였지만,
나도 해외팀에 입사했다고.


그는 축하한다고 말했다.
그날, 우리는 서로의 명함을 교환하며
와인 한 잔을 나눴다.


그의 얼굴이 유난히 따뜻해 보였다.
짧은 웃음이 오가고,
잔 사이로 빛이 흔들렸다.


나는 용기를 냈다.
살짝, 그의 어깨에 기대었다.


그는 놀란 듯 나를 바라봤다.
잠시 정적이 흐르고,
그의 시선이 내 눈가에 머물렀다.


짧은 숨, 조용한 웃음,

그리고 닿을 듯한 온기.


그 순간,
심장이 뜨겁게 뛰었다.


“왜 이제야 하는 거야?”
내 입에서 그 말이 흘러나왔다.


그는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그전엔… 네가 신고할까 봐.”


우리는 동시에 웃었다.
그 웃음 속에는
서툰 마음이 엉켜 있었다.


그는 집 앞까지 데려다주며 말했다.
“내일 회사에 입고 갈 옷이 있어서 다행이다.”


그 말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조심스러운 초대처럼 들리기도 했고,
스스로를 지키려는 거리감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때의 나는,
그 말이 ‘함께 있고 싶다’는 뜻이라고 믿었다.


오늘은 곤란해.”
나는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 문을 닫았다.


그날 밤,

잠이 오지 않았다.
“내가 너무 적극적이었나?”
“부담스러웠을까?”
끝없는 질문이 머리를 맴돌았다.


아침이 오고, 하루가 지나도 그의 전화는 오지 않았다.
다음날 점심이 한참 지난 낮,
나는 결국 전화를 걸었다.


“오늘 뭐 해?”

잠시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

“내가 왜 널 만나줘야 하냐고!”


그의 목소리는 절규에 가까웠다.
단지 화를 내는 게 아니었다.


그건 무너지는 사람의 소리였다.
짐승이 마지막으로 울부짖을 때처럼,
두려움과 수치, 그리고 자기부정이 뒤섞인 목소리였다.


하지만 그때의 나는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그 절규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
무엇을 향한 고통이었는지.


다만, 오래전 그 말이 떠올랐다.
“이제 너는 나랑 안 맞아.”


그때처럼 이번에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다듬어지는 대신,
나는 침묵으로 나를 지켰다.


그의 절규와 나의 침묵 사이,
짧은 순간 동안 세상이 고요해졌다.


서울과 지방,
대기업과 작은 회사,
성공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
그 사이엔 보이지 않는 벽이 있었다.
우리는 그 앞에서
사랑보다 먼저, 서열을 배웠다.


그날 이후,
나는 그를 다시 볼 수 없었다.
계절이 몇 번을 바뀌고,
삶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날의 말은 내 안에서 계속 되새김질됐다.
시간이 흘러도, 그 목소리가 사라지지 않았다.


15년이 지나서야,
나는 그를 다시 마주했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이렇게 말했다.


“그때… 내가 서툴러서 미안했어.”




루나,
나는 그 말을 왜 했을까?.
후회도, 변명도 아니었는데,
그저 오래 묵은 돌멩이 하나를
마음속에서 꺼내놓는 기분이었다.
그 말이
내 안의 시간을 깨운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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