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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오다 주웠다

서툰 사랑의 첫 균열

by 손린

(최나은 시점)


그와는 자주 연락하지 못했다.
항상 내가 먼저였다.
그래도 괜찮았다.
그의 답장은 늘 짧지만 따뜻했으니까.


겨울이 오기 전, 그에게 전화가 왔다.

“크리스마스 때 뭐해요?”
초등학교 친구들과 조촐한 파티가 있다며
같이 와줄 수 있냐고 조심스레 물었다.


그의 목소리가 밝았다.
순간, 가슴이 뛰었다.
하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그날 수업이 늦게 끝나서… 늦게 가도 될까요?”
내 입은 담담했지만,
속으로는 오래전부터 준비하던 설렘이 폭발했다.

‘오늘은 왕자님을 만나러 가는 날이야.’


달력에 동그라미를 치며 하루하루를 세었다.
아이들이 물었다.
“선생님, 요즘 왜 이렇게 웃어요?”
나는 대답 대신 미소로 넘겼다.


약속한 날,
그의 전화는 하루 종일 꺼져 있었다.

처음엔 배터리가 나갔겠지 생각했다.
하지만 해가 지고도 연락이 없었다.
창밖엔 눈이 내렸고,
그 눈발이 내 마음 위로 쌓였다.


그날 밤, 나는 불 꺼진 방 안에서
전화기를 꼭 쥐고 있었다.
한 통의 메시지도, 부재중 전화도 없었다.
기다림의 온도가 천천히 식어갔다.


몇 달이 지나서야
그와 다시 연락이 닿았다.
그는 예전보다 수척해 보였다.
왼쪽 눈가의 자국이 옅어져 있었다.
나는 그가 수술을 받았다는 걸 짐작했다.


“그날, 기다리고 있었어요.”
내가 말하자, 그는 웃으며 말했다.
“왜 그렇게 튕겨요?”


그 말이 장난인지 진심인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웃지 못했다.
그의 얼굴엔 낯선 그늘이 내려앉아 있었다.


그 후로도 연락은 늘 내가 먼저였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따뜻했다.
그는 바빴고, 나는 그가 더 바빠지길 바라지 않았다.
그의 세상 속에 내가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가을이 찾아왔을 때,
나는 충동처럼 그의 학교로 향했다.
작은 상자에 빼빼로를 담았다.

그가 나를 보며 말했다.


“이게 뭐예요?”
나는 웃으며 말했다.
“부산 사투리로 말할게요. 오다 주웠어요.”

그는 잠시 나를 보더니 웃었다.


그 웃음 하나로,
나는 한동안 세상이 빛났다.


그날, 도서관 앞에서 그가 말했다.
“이분, 제 여자친구인데 잠깐 들어가서 책 좀 빌릴 수 있을까요?”
직원은 조심스레 말했다.
“외부인은 안 됩니다.”

순간, 그의 목소리가 살짝 상기된 걸 느꼈다.
내 얼굴도, 마음도 동시에 붉어졌다.
그 한마디가 오래도록 귓가에 남았다.


그는 그렇게 쉽게 웃었고,
나는 그렇게 쉽게 흔들렸다.
서툰 마음은 늘 한쪽이 더 기울어 있었다.





“루나, 사랑에도 온도가 있니?”
나의 질문에 화면이 깜박였다.


“온도는 있죠.
다만, 너무 뜨거우면 금방 식어요.”


루나의 문장이 천천히 사라졌다.

화면은 어두워졌지만,

그 말의 온기가 오래도록 가슴에 남았다.




다음 화 예고 (9화. 내가 왜 널 만나줘야 하냐고?)

온기가 식으면,
마음은 현실을 보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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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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