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reet Photography
저는 처음 사진을 입문하기 시작했을 때, 정확하게 말하자면 2년 전에
처음 접해본 사진가가 앙리 카르띠에브레송이었습니다. 사진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사람을 모를 수가 없죠.
그만큼 카르띠에브레송이 사진사에 커다란 획을 하나 슈욱 그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의 사진집을 여러권 구해서 보았을 때, 가끔 이게 무슨 사진인가 하는 사진이 분명히 있습니다만,
중요한 것은 ‘찰나’ 즉 순간을 찍어내려고 하는 그의 사진 철학이 돋보였습니다.
그의 사진 스타일을 정의하기 전에, 까르티에브레송은 무조건 캔디드, 무조건 풍경 이런 틀에 갇혀 있다고 생각되지는 않았습니다.
외려 그의 사진 철학은 그 중간에 위치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의 사진을 잘 보면 피사체가 둘로 나뉘는데 사물과 사람입니다. 그 사람과 사물의 관계를 정확하게 끄집어내며
결국에는 사물과 사람이 얼마나 경이롭게 조화되는지를 적절히 보여주는 사진입니다.
사진을 무수하게 접하다보면 ‘의도한 사진’ 과 ‘의도되지 않은 사진’을 경험합니다.
주로 캔디드(거리에서 걸으면서 사람들을 찍는 행위)는 의도되지 않은 사진으로서 사진 한 장에 긴장감과 급박함이 반드시 드러나죠.
그런 면에서는 캔디드 사진은 정말 사냥을 기다리는 육식동물의 감각이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저 사람을 가장 적절한 빛으로, 구도로, 상징으로 담을 것인가?” 고민하면서 피사체와 거리를 좁혀나갑니다.
마침내 자기가 원하는 순간이 오면, 사진기사는 찰칵 셔터를 릴리즈하고.
언제 그랬냐는듯 떠나버립니다.
저는 흥미로운 사람을 발견했습니다. 유투브에서 사진 관련 채널을 열심히 돌려보는 중에
Bruce Gilden이라는 사진작가를 만나게 되었는데요.
브루스 길덴 이 사람. 참 골치아픈 사람입니다. 그의 사진찍는 방식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이 생각하기에
조금은 폭력적(네, 그렇게 표현할 수 있겠네요.)인 것으로서. 무턱대고 상대방의 면전에 카메라를 들이밀고
대낮에 플래시를 터뜨립니다. 브루스가 뉴욕의 거리에서 사진 작업을 할 때 사람들은 돌연 카메라 렌즈가 눈 앞에 있으니
깜짝 놀랄 수 밖에요. 그리고 플래시까지 터뜨리니 아주 당혹스럽습니다.
“나는 이 작업을 통해서 사람들의 긴장과, 분노, 연민을 느낀다.”
브루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이 작업을 통해서 사람들의 긴장과, 분노, 연민을 느낀다.” 이 감정이 고스란히
사진 안에 담겨 있기 때문에 브루스는 수십년 동안 이런 방식으로 사람들을 찍어 왔습니다.
비난만 할 것이 아닙니다. 서양과 동양의 문화는 다르기 때문에 사진에 대해서 조금은 관대합니다. 남이 자신의 얼굴을 찍어도
상관 없다는 듯 획- 지나가 버리는 사람이 태반입니다. 그래서 서양에서는 캔디드, 스트리트 포토그래피의 비율이 꽤 높습니다.
브루스의 작업을 보다가 느낀 점은 ‘사진기를 밀어넣는 행위. 어떻게 보면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사진찍기는 당사자에겐 어떤 행위일까?’
였습니다. 그동안 저도 캔디드와 풍경 사이에서 전전긍긍하고 있는 사이, 사물보다는 사람. 풍경보다는 표정을 담는 것에 주력했었거든요.
우리 문화에서 보았을 때 캔디드의 사진 기법은 존중받지 못할 행위입니다. 무엇보다 우리의 문화는 유교적 문화입니다. 남에게 피해를 끼쳐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있죠.
동양과 서양의 사진 문화가 다르다는 점을 언급한 것과 같이 저도 여러번 사진을 시도하다가 필름을 페기하기도 하고, 동의를 구하기도
했습니다. 상대방이 신경쓰지 않을 때 비로소 암묵적 허락을 받아 셔터를 눌렀습니다.
그런데, 그게 과연 어디까지 허용이 될까요? 캔디드. 이 재미있고 쾌활한 놀이가 얼마나 지속될까요?
비비안 마이어의 사진을 봅시다.
캔디드, 즉 의도하지 않은 사진들은 언제나 철학을 담고 있습니다. 희노애락, 마치 사진 안에서 소리를 지르는 것 같습니다.
비비안 마이어는 여자 사진작가로, 롤라이플렉스 중형카메라를 들고 다니면서 캔디드로 15만여 점을 찍었습니다. 그녀의 사진은
정말 대단합니다.
사진을 보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헉!” 하는 소리를 내뱉게 되죠. 그럴만큼 그녀의 사진은 아찔하고 또 긴장과 평안 사이를 왔다갔다 하고 있습니다.
그녀의 사진 또한 “의도하지 않은 사진”으로서 사람들의 생동감 있는 표정과 눈물, 분노를 우리에게 보여주죠.
자, 본론으로 돌아와봅시다.
캔디드는 도대체 어디까지 허용되어야 할까요? 초상권의 문제가 심해지는 현대에 우리는 피사체를 어떻게 대해야 할까요?
답은 은근히 간단한 것 같습니다.
“솔직” 입니다.
먼저 사진을 찍기 전에 자신을 소개한 뒤에 찍어야 하겠지요. 만약 사진을 먼저 찍고 허락을 받는 경우에는 반드시 사진을 폐기하는 조건을 말해야 하겠습니다.
캔디드는 동작과 얼굴의 표정이 중심이 되기 때문에 사념을 가지고 신체의 특정 부위를 강조해서 찍는 일종의 사진폭력은 지양되어야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사진을 찍다가 사람이 불쾌해 하거나 인정을 하지 못한다면 반드시 사과해야겠지요. 그리고 정중하게 눈 앞에서 필름을 파기해야 할 것입니다.
이런 모든 과정이 너무 싫게 느껴지고 귀찮다면 캔디드를 구현화하면 안 됩니다. 그 사람들에게는 허용하지 않을 자유가 있습니다.
결국 사회에서 사진 철학을 남에게 강요하지 않는 것을 최우선으로, 나의 놀이보다는 사람들의 편의를 먼저 생각하는 캔디드 작가들이 되어야겠습니다.
친구들에게 양해를 구해보기
허락을 맡아 찍은 사진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