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_윗집엔 신이 산다

세입자 수필 <2년에 한 번>

by 집순

태어나서 지금까지 살았던 집을 세어봤습니다. 모두 16곳. 각 집마다 머무른 기간은 다 다르지만 태어난 순간부터 2년에 한 번 꼴로 이사를 다닌 격입니다. 앞으로는 한 곳에 조금 더 오래 머물 수 있게 될까요? 죽을 때까지 저는 몇 개의 방을 거치게 될까요.


끊임없이 집을 구하고 짐을 싸고 풀면서 원망도 많이 했지만 때로는 비를 피할 나만의 공간이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기도 했습니다. 한 번쯤 그 모든 방들에 대해 적어보고 싶었습니다.




18_윗집엔 신이 산다


우리 윗집엔 신이 산다. 조물주보다도 더 윗길을 걸으신다는 그분, 바로 집주인님이다.


은빛 머리칼에 안정감을 주는 아담한 키, 심장까지 꿰뚫을 듯 부릅뜬 눈의 집주인 아저씨는 신다운 지엄한 태도를 지니고 있다. 장판이 울렁울렁 울어도, 벽지가 너덜너덜거려도 아저씨의 ‘안돼!’ 한 마디면 모든 것이 잠잠해진다. 또한, 그는 제우스에 비견될만한 천둥 같은 목소리의 소유자다. 왜 관리비를 안내냐고 호통을 치실 땐 세상 만물이 사시나무 떨듯 한다.


물론, 그는 온화함도 갖추신 완벽한 분이다. 내가 “관리비 이미 냈어요 아저씨. 확인 좀 제대로 하세요!”라고 목소리를 높이면 그는 세상 어느 누구보다 달콤하고 보드라운 목소리로 “아~ 그랬어요~?”라고 금세 화답하신다. 뿐만 아니다. 때때로 다정함과 세심함이 가득한 문자 메시지로 인간들의 지친 마음을 어루만져 주신다. 예를 들어,


“안녕들 하시지요 지난번에협조해주셔서 감사함니다.”

“변기옆 밸부를 항상 잠거주셔요.”


같은 것들이다.


하지만 인간에게 신은 언제까지나 경외의 대상일 수밖에 없다.


나는 감히 그분의 따님을 분노케 한 적이 있었다.


전 세대의 현관문을 청록색으로 칠한다는 그녀의 서릿발 같은 방침에 내가 반기를 들고 흰색을 유지하겠다고 했기 때문이다. 그 아버지에 그 딸 아니랄까 봐, 그녀는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다 칠하는데 어떻게 여기만 안 해요. 할 때 다 해야지!”라고 폭풍처럼 나를 꾸짖었다. 그녀의 노여움은, 옆에서 보다 못한 페인트공 아저씨가 “아유 요샌 현관문도 다 인테리어의 일환인데. 집 안쪽 문까지 청록색으로 칠하면 방이 시커매 보여서 못써요”라고 간청한 후에야 가까스로 풀어졌다.


그저 자격지심인 걸까? 집주인들은 언제나 목소리가 컸던 것 같다.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지 않아도 그들의 목소리는 항상 선명하고 똑발랐다. 반면에 나는 세입자로 산 10여 년째 전화기에 ‘집주인’ 세 글자가 뜨기만 해도 얼굴이 굳고 심장이 뛴다. 현관문을 열려고 하다가도 집주인네의 목소리, 발소리가 들리면 문고리를 잡은 채 그들이 지나갈 때까지 잠시 서 있곤 한다.


그러다 요즘은 이런 생각이 든다.


‘아니지, 내가 왜?'


‘난 돈을 지불하고 정당하게 이 공간을 빌린 사람이야. 집주인이 은혜를 베풀어서 공짜로 여기 살고 있는 게 아니라고. 집주인에게 나는 고객님이다! 고객님은 왕이라고!! 단… 보증금을 볼모로 잡혀서 그렇지….”


얼마 전 지방에 사는 동생한테 연락이 왔다. 급전이 필요한데 2 금융권 대출을 받아도 괜찮으냐고 물어왔다. 얼마 전 장기전세 주택에 당첨돼서 보증금을 내야 하는데 현재 살고 있는 집주인이 보증금을 못 준다고 했단다. 이사를 가든 말든 다음 세입자가 들어와야 돈을 주겠다고 으름장을 놨다. 세입자들에겐 모래알처럼 흔한 일이다. 그런데 이 집주인은 거기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가, 2년 계약이 만료되고 나가는 것인데도 동생더러 부동산에 집을 내놓고 복비까지 부담하라고 요구했다.


가만히 있을 동생이 아니었다. 동생은 어디에서 주워들은 풍월로 ‘내용증명’이란 걸 보내겠다고 집주인에게 엄포를 놓았다. 내용증명은 ‘이러저러한 배경으로 내 돈을 내놓을 것을 모월 모시에 요구했다’는 것을 공식화하는 절차라고 한다. 이걸 보낸다고 집주인이 당장에 돈을 뱉어야 하는 것도 아니지만, 그래도 그 내용증명이라는 말이 어찌나 신통방통한지 집주인은 금세 태도를 바꿨다. “맘대로 하세요!”라며 전화를 끊었다던 그는 전에 없이 정중한 태도로 다시 전화를 걸어와 “지난번엔 제가 실례가 많았어요. OO에서 일하시죠? 저도 그 바닥에 있던 사람이에요. 나와서 사업 좀 해보려고 했더니 그게 실패해서... 어쩌면 세입자들보다 제가 더 돈이 없을 수도 있어요”라고 뜬금없는 신세타령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어쩌라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런 일로 골머리를 앓고 있을 때면 누군가는 쉬운 위로를 건네기도 한다.


“이사할 때 확정일자 받았지? 그럼 세입자가 선순위니까 소송해도 100% 니가 이겨.”


글쎄. 소송에는 시간과 돈이 들어간다. 그 사이 세입자들의 삶은 형편없이 엉클어지고 만다. 이기든 지든 피해를 입는 쪽은 정해져 있다. 밖에서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다 해도 평범한 일상이 계속된다면 누구나 어느 정도는 버틸 수 있다. 하지만 일상이 무너졌을 때 이를 견뎌 낼 수 있는 사람은 아마 단 한명도 없을 것이다.


7개월 후면 나도 16번째 집에서 만 2년을 맞이한다. 부디 윗집 신과 아름다운 이별을 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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