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_떠나는 자의 뒷모습

세입자 수필 <2년에 한 번>

by 집순


태어나서 지금까지 살았던 집을 세어봤습니다. 모두 16곳. 각 집마다 머무른 기간은 다 다르지만 태어난 순간부터 2년에 한 번 꼴로 이사를 다닌 격입니다. 앞으로는 조금 더 한 곳에 오래 머물 수 있게 될까요? 죽을 때까지 저는 몇 개의 방을 거치게 될까요.


끊임없이 집을 구하고 짐을 싸고 풀면서 원망도 많이 했지만 때로는 비를 피할 나만의 공간이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기도 했습니다. 한 번쯤 그 모든 방들에 대해 적어보고 싶었습니다.



16번째 집 벽 한구석. 전 세입자는 저기에 뭘 붙여놓으셨을까.


02_떠나는 자의 뒷모습


혼자 집에 있을 때면 가만히 집을 둘러본다.


아무것도 없는 벽 그리고 천장과 벽의 이음새, 문틀이나 전등 스위치의 위치 같은 것.

방한 칸이니까,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아도 천천히 모든 걸 자세히 관찰할 수 있다.

'예전 세입자가 저기에 행거를 뒀었나 보구나.'

'집 보러 왔을 땐 저기가 침대 자리였는데.'이런 생각을 한다.


그 모든 낡아빠진 것을 오래오래 보고 있자면

‘그동안 이 집엔 어떤 사람들이 살았을까?’

‘그 사람들은 집에 혼자 있을 때 뭐 하고 있었으려나.’

쓸데없이 이런 게 궁금해진다.


이사 오기 직전에 살았던 사람은 그나마 어떤 사람인지 조금 짐작이 간다.

집을 구하러 다닐 때 전 세입자의 방을 보게 되기 때문이다.


내 15번째 집의 전 주인은 결혼을 앞둔 직장인 남자였다. 신혼집으로 물건을 좀 옮겼는지 가구나 짐이 많지 않았다. 주방에는 낡고 더러운 가스레인지가 놓여 있었다. 결혼하실 분이라기에 버리실 거라면 내가 사겠다고 부동산에 말해두었다. 하지만 세입자가 팔지 않겠다고 해서 새 가스레인지를 샀다. 그런데 이삿날 그분이 그 낡은 가스레인지를 버려두고 간 걸 알게 됐다. “뭐지…”


가스레인지만 버리고 간 게 아니었다. 종량제 봉투에 넣지 않은 각종 쓰레기도 함께였다. 화가 났지만 별도리가 없었다.

‘그래, 냉장고에 음식물 버리고 가는 인간들도 있다는데.’하는 위로 같지 않은 위로를 하며 쓰레기를 치웠다. 부디 그분이 결혼해서는 재활용품 분리수거도 잘 하시고 쓰레기는 종량제 봉투에 합법적으로 넣어 버리시기를 빈다.


16번째 집의 세입자는 얼굴을 보고 대화도 나눴다. 꼭 본인이 있을 때 집을 보러 오라고 했기 때문이다. 집주인이나 부동산에 집 비밀번호를 알려주기 싫었던 것 같다. 집을 보러 가는 길에 집주인과 부동산 중개인이 세입자를 욕했다. 하지만 나는 그 세입자가 너무 이해됐다. 비번을 안 알려줘도 문을 따고 들어오는 세상인데 그럼.


세입자는 빨래를 널고 있었다. 빨래를 너는 그녀 뒤로 창문에서 쏟아지는 햇빛과 가벼운 바람이 느껴졌다. 이 집으로 이사올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실례가 안 된다면 왜 나가시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집주인이 월세를 올려달라고 하니깐 그렇죠.”

퉁명스러운 답이 돌아왔다.


급하게 이사를 해야 했던 나는 결국 나는 그 집으로 이사를 결정했다. 계약서를 쓰는 날 부동산에서 다시 한번 전 세입자와 그분의 어머니를 마주쳤다. 집을 보러 갔을 때와 달리 세입자의 표정이 조금 더 편안해진 것을 느꼈다.


'괜찮은 집을 구한 걸까?'


묻지는 못하고 부동산을 나오는데 전 세입자의 어머니가 웃으며 나에게 이런 인사를 해주셨다.


“잘 살아요. 우리도 잘살았으니까~”


그게 너무 멋있었다.


그들이 남기고 간 집 역시 정갈했다. 누군가가 항상 쓸고 닦고 사랑하던 집에 내가 살게 됐다는 사실에 왠지 모르게 안심이 됐다.


나도 언젠가 다음 세입자를 만나게 된다면 꼭 그 어머니처럼 멋진 인사를 건네고 싶다.


“잘 살아요. 나도 잘살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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