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_할머니의 독립

세입자 수필 <2년에 한 번>

by 집순

태어나서 지금까지 살았던 집을 세어봤습니다. 모두 16곳. 각 집마다 머무른 기간은 다 다르지만 태어난 순간부터 2년에 한 번 꼴로 이사를 다닌 격입니다. 앞으로는 조금 더 한 곳에 오래 머물 수 있게 될까요? 죽을 때까지 저는 몇 개의 방을 거치게 될까요.


끊임없이 집을 구하고 짐을 싸고 풀면서 원망도 많이 했지만 때로는 비를 피할 나만의 공간이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기도 했습니다. 한 번쯤 그 모든 방들에 대해 적어보고 싶었습니다.





03_할머니의 독립


지난해 할머니가 폭탄선언을 했다.


모든 부모가 그렇듯 자식에게 누가 되지 않는 것이 지상 최대 목표였던 할머니가 장남인 큰삼촌에게

“혼자 살고 싶으니 보증금을 해달라”라는 간 큰 요구를 한 것이다.


우리 할머니는 젊은 나이에 남편을 잃고 4남매를 혼자서 키워내셨다. 나이가 들어서는 큰 아들네와 함께 살면서 맞벌이하는 삼촌 내외를 대신해 손주 3남매를 길렀다. 한 평생 키우고 키우다 보니 할머니는 결국 할머니가 됐다. 손주들이 다 자라 뿔뿔이 흩어진 지도 이미 수년. 할머니는 어느 날 무슨 결심이 섰는지 가족들의 반대를 뚫고 독립에 성공하셨다. 이모네 집과 우리 엄마 집이 지척에 있긴 하지만 엄연한 독립은 독립이다.


엄마는 드디어 할머니가 소원을 성취했다고 자못 결연하게 말했다. 할머니는 사실 예전부터 계속해서 독립을 하려고 했으며 번번이 현실의 벽에 가로막혀 왔다며.

역시, 내가 아는 한 세상에서 가장 쿨한 우리 할머니.


“큰 삼촌네랑 뭐 마음 상하는 일 있었던 거 아냐?”

“혼자 계시면 너무 외롭지 않을까? 여럿이 있다가 갑자기 혼자 있으면 심심하잖아.”


처음에는 이런 섣부른 오해를 하기도 했다. 하지만 새로운 집에서 만난 할머니는 그 어느 때보다 기력이 넘치고 무엇보다 편안해 보였다. 하긴, 생각해보면 할머니는 단 한순간도 혼자 살아본 적이 없다. 어린 나이에 결혼해서 가족과 함께 한 평생을 살아왔으니까. 이쯤 되면 혼자만의 삶을 꿈꿀 만도 하지 않을까?

모든 어르신들이 무조건 누군가와 함께 살기를 원할 거라는 생각은 어쩌면 늙어본 적 없는 사람들의 큰 착각일지도 모른다.


할머니의 새로운 보금자리는 광주에서도 변두리에 자리한 낡아빠진 13평짜리 아파트. 요새 미니멀 라이프가 유행이라지만 내가 본 집 중에 가장 미니멀한 집은 우리 할머니의 집이다. 독실한 기독교도이시지만, 반드시 필요한 최소한의 것만을 담은 할머니의 방은 선방(禪房)을 연상케 한다.


“할머니. 혼자 있을 때는 뭐해요?”


잡동사니는 고사하고 먼지 한 톨 없이 반짝이는 장판에 볼을 대고 누워 나는 할머니에게 종종 물어본다.


“바닥 찬디 침대에 누워라.”

할머니는 대답 대신 얼른 베개를 가져다주신다.


“여름에는 햇빛이 여그까지 드루와. 가을에는 쩌어그까지.”

그리곤 손가락으로 방바닥 이곳저곳을 가리키며 뜬금없는 햇빛 이야기를 한다.


때로는 베란다로 나가 조그만 화분 몇 개를 들여다보며 뿌듯함을 감추지 못하신다.

“저 것이 처음에는 꼭 죽은 거 같더니만 꽃대가 계속 올라 온당께.”


그런 얘기를 나누다 보면 나는 한 번도 빠짐없이 깊은 잠에 들고 만다.


어디선가 봤는데, 혼자서 사는 건 자기 자신과 사는 일이라고 한다.


스스로와 마주하기 위해서는 할머니는 자신만의 방을 요구한 것 아닐까. 사느라 바빠서, 아이들을 돌보다 보니 정신이 없어서. 그렇게 미루고 미뤄온 혼자만의 시간을 이제 할머니는 누리고 계신다. 죽은 남편도, 다 큰 자식과 손주도 아닌, 온전히 자기 자신만 생각하는 그런 시간 말이다.


역시, 세상에서 제일 쿨한 우리 할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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