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집순 Jun 14. 2019

[연수편_5]절벽이 나를 부를 때

굴러가 어쨌든





‘놓칠 것 같아. 손이 풀릴 것 같다……’ 그는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것만으로도 두려웠다. 왜냐하면 이제 그의 손이 생각의 어두운 힘에 복종해 천천히 풀리면서 그를 어둠 속에 놓아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는 아직 싸울 수 있고 자신의 운을 시험해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외적인 숙명이란 없다. 그러나 내적인 숙명은 있다. 인간에게는 스스로의 나약함을 깨닫는 순간이 온다. 그 순간 여러 실수들이 현기증처럼 우리를 엄습한다.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 <야간비행> 중에서-



내적인 숙명이라...


“정말 그렇게 말씀하셨다고?”

“그렇다니까.”

“앜ㅋㅋㅋㅋㅋㅋㅋ”



나는 눈물이 줄줄 흐를 정도로 자지러지게 웃고 있는데 이야기를 하는 친구는 정색한다. “야 그날 나 태어나서 첨으로 아빠한테 미쳤냐고 소리쳤어!” 친구가 아버지가 모는 차를 타고 구불구불한 산길을 가고 있을 때였다. 아파트 주차장에 주차를 하려다가도 포기하고 아내에게 종종 S.O.S를 치신다는 친구네 아버지는 운전에 서툴고 관심도 없는 분이란다. 그런데 그날은 하필 산길을, 그것도 깎아지는 듯한 절벽에 난 길을 달리게 된 것이다. 차 손잡이에 거의 매달린 채로 조수석에 앉아있던 친구는 아버지로부터 믿을 수 없는 말을 들었다.


“아들아… 절벽이 나를 부른다.”



“아빠. 정신차려!” 다급해진 친구가 외쳤다. 하지만 아버지는 아랑곳하지 않고 중앙선을 넘어 역주행을 하기 시작했다. 낭떠러지와 조금이라도 먼 반대편 차선으로 옮겨탄 것이다. 차가 정말로 드문 해외의 어느 호젓한 도로였다는데, 아무리 그래도 정말 아찔한 얘기다. 하지만 뭔가에 홀린 듯이 ‘절벽이 나를 부른다’는 문장을 육성을 내뱉는 중년의 남자를 떠올리면 곤란하게도 웃음이 난다. 그리고 안도감이 든다. 나도 종종 비슷한 류의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야간비행>에 등장한 ‘스스로의 나약함을 깨닫는 순간’. 나는 그 순간이 운전을 할 때 올까봐 무섭다. 운전사고에 대한 특별한 트라우마가 있는 것도 아닌데, 자꾸만 두려움이 불쑥불쑥 고개를 든다. 내가 상상하는 상황은 언제나 똑같다. 빈 도로에서 멀쩡히 운전을 하고 있던 내가 갑자기 뭔가에 홀린 듯 핸들을 홱 꺾어버리는 상상이다. 이런 얘기를 지인에게 했더니 진지한 표정으로 듣던 그가 짧게 말한다. “미쳤구만?”



운전 연수를 하는 토요일, 잠실대교를 건너면서 시끄러 선생님에게 내 두려움에 대해 얘기했다. “선생님. 저는요 아무 일 없이 가다가 건너편에서 오는 차도 없는데 혼자서 핸들을 꺾어버릴 것 같아서 불안해요. 진짜 이상하죠?” 평소처럼 시끄럽다고 운전이나 하라며 면박을 주리라 예상했는데, 선생님은 의외로 진지한 표정이다. “나는 옛날에 이런 다리, 큰 다리를 건널 때면 꼭 강에 빠질 것 같더라고. 그래서 늘 긴장이 됐었어. 다들 똑같애. 괜히 무서운 게 있는 거야.” 그는 한 때는 빠질 까봐 무서웠다던 한강을 조수석 창문으로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그날 이후 왠지 마음이 좀 후련했다. 내 안에 나도 모를 깊은 어둠이 있는건 아닐까, 잠시 두려웠는데 다들 엇비슷한 공포증이 있다니. 친구의 아버지와 운전선생님도, 무려 생텍쥐페리까지 말이다. 심지어 내가 인생의 지침서로 삼고 있는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에서 작가 더글라스 애덤스는 인간 뿐 아니라 우주의 모든 존재가 이런 불안증을 갖고 있다고, 이하와 같이 적고 있다.



“이 모든 얘기를 들으니 많은 일들이 설명되는 군요. 이제껏 저는 이 세상에 뭔가가 일어나고 있다는 설명할 수 없는 기이한 느낌을 가지고 살았어요. 뭔가 끔직하고 불길하기까지 한 일 말이에요. 하지만 아무도 그게 뭔지 제게 말해주려 하지 않았죠.”
“그건 아니오. 그건 완전히 정상적인 편집증이오. 우주의 모든 사람이 갖고 있는 병이지.”
“누구나요? 누구나 그걸 갖고 있다면 그건 분명 뭔가 의미가 있다고요! 어쩌면 우리가 알고 있는 우주 바깥 어딘가에서….”
“그럴지도 모르지.”
아서가 너무 흥분하기 전에 슬라티바트페스트가 말했다.


“하지만 무슨 상관이오?”



그래, 그게 다 뭔 상관이냐.



이전 05화 [연수편_4]브레이크가 있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