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러가 어쨌든
내가 자라섬재즈페스티벌에 처음 간 것은 지금으로부터 12년 전인 2008년이었다. 지금은 재즈를 주제로 한 뮤직페스티벌이 꽤 있지만, 그때만해도 재즈 페스티벌은 자라섬이 유일했다. 그래서인지 다른데선 보기 힘든 골수 재즈팬들을 자라섬에선 만날 수 있었다. 아직도 맨 앞줄에서 온 몸으로 리듬을 타며 스캣(scat∙재즈에서 가사 대신 아무 뜻 없는 음절을 넣어 부르는 창법)을 하던 범상치 않은 관중들과 잔디밭 구석에서 음악에 맞춰 맨발로 춤을 추던 커플, 엉덩이로 피아노를 치던(실화입니다) 빨간 옷의 오마르 소사를 잊을 수 없다.
축제는 너무나도 즐거웠지만 아무래도 뚜벅이 입장에선 불편한 점이 많았다. 요새야 셔틀버스가 새벽까지 다닐 정도로 교통 편의가 나아졌으나, 당시엔 조금만 밤이 늦으면 서울로 돌아갈 방법이 없었다. 돗자리니 먹거리니 짐은 많은데 기차며 버스를 갈아타고 다니기도 힘들었다. 언젠가는 이 멋진 축제에 내 차를 끌고 오고 싶다 생각했고 제15회 자라섬재즈페스티벌에서 내 희망은 이뤄졌다. (물론 내 차는 아니지만... 공유차를 타고!)
마침 그해 자라섬재즈페스티벌에 가기 전, 자라섬으로 운전 연습을 갈 기회가 있었다. 한 주류회사가 주최하는 뮤직페스티벌 티켓이 생긴 것이다. 라인업에 나의 사랑 아이유님이 계셨기에 나는 주저하지 않고 자라섬으로 달려가기로 했다. 그런데 아침부터 하늘이 꾸물꾸물하더니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뭐 어때, 차 타고 가면 괜찮을 거야. 동생과 나는 아이유님의 라이브를 들을 생각에 들떠 룰루랄라 차에 몸을 실었다.
운전하다가 살짝 비가 내린 적은 있었지만 본격적으로(?) 비 내리는 날 운전을 한 건 그 날이 처음이었다. 젖은 도로가 빛을 반사해서 차선이 잘 보이지 않았다. 눈을 가늘게 뜨고 봐도 도무지 차선을 분간하기가 힘들었다. 그러나 주변의 차들은 맑은 날과 다름없이 대담하게 질주하고 있었다. 내가 초보라서 차선이 안보이나? 역시 운전 선배님들의 눈엔 차선이 잘 보이는 건가? 운전하는 내내 내 시력을 의심했다. 이후로 나는 비 오는 날 다른 사람의 차를 타게 되면 늘 물었다.
"지금 저 차선… 내 눈에만 안보이는 거죠?"
운전 선배들은 하나같이 이렇게 답했다.
"어~ 안보여~~~"
그렇다. 내 눈이 잘못된 건 아니었던 거다. 그렇담 분명 다른 차들도 차선이 잘 안보일텐데... 왜 저렇게 기세 좋게 달리는 걸까. 아무튼 비 오는 날은 무조건 절대 감속, 안전 운전만이 답이다...
거침없이 달리는 차들 사이에서 홀로 절대 감속을 고수하며 경기도 가평군 가평읍 자라섬에 도착했다. 일찍 간다고 갔는데도 행사장 인근 주차장에는 주차할 공간이 없었다. 결국에는 한참을 걸어가야 나오는 임시 주차장에 차를 대고 나왔다. 우산을 받쳐들고 행사장 안에 자리를 폈는데 비가 더 쏟아졌다. 두 사람이 가까스로 엉덩이를 붙일만한 크기의 미니 돗자리로는 빗물을 피할 도리가 없었고 3단 우산으로는 옆으로 들이치는 비를 막을 수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밤이 되자 입김이 나올 정도로 기온이 떨어졌다. 집에 있는 큰 돗자리와 장우산, 따뜻한 옷과 담요가 간절하게 생각났다. 심지어는 먹을 간식 한 봉지, 음료수 한병 들고 온 게 없었다. 둘이서 한 명씩 번갈아 가며 음식을 사오느라 공연은 각각 혼자서 즐기는 모양새가 돼 버렸다. 무엇보다도 술을 마실 수 없다는 게 나를 슬프게 했다. 필요 이상으로 또렷한 맨정신으로, 나와 동생은 오들오들 떨며 비에 젖은 음식을 먹었다. 그러면서 여러번 이렇게 자문했다.
“우리… 왜 굳이 차 끌고 왔지?”
운전은 할 수 있게 됐지만, 나는 여전히 뼛속 깊이 뚜벅이였던 것이다. 실은 운전을 시작한지 3년이 지난 지금도 뚜벅이 DNA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외출할 때엔 짐을 최대한 간소하게 꾸리고, 선글라스는 늘 서랍장에 고이 모셔두며(도로에는 그늘이 없기 때문에 선글라스가 없으면 눈이 멀 듯한 고통을 느껴야 함), 무거운 짐이 있어도 차 앞까지 낑낑대고 들고 가서 싣는다. 습관이란게 이렇게 무섭다.
공연이 끝나고 관중이 일시에 움직이면 차가 막힐까봐 우리는 아이유님의 첫 곡인 ‘금요일에 만나요’를 듣자 마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는 길에 동생이 화장실이 급하다며 간이 화장실로 황급히 뛰어갔다. 시원하게 장을 비우고 있을 동생을 기다리는데 저 멀리에서 아이유님이 밤편지를 부르기 시작했다. 동생도 화장실에서 그녀의 목소리를 들었다고 했다. 거기 서서 밤편지를 들으며 차가 있다고 마냥 편한 건 아니구나, 하고 생각했다. 거기서 나는 진짜 운전자가 되어가고 있는 중이었다.
그래도 그해 자라섬재즈페스티벌엔 직접 운전해서 갔다. 다행이 날씨가 맑아 축제를 편히 즐길 수 있었다. 파블로 지글러 트리오의 탱고 연주가 정말 엄청났는데, 아직까지 기억에 선명히 남은 음악은 '자라섬 체조송'이라는 게 함정이다. 아마 15회 페스티벌을 간 사람들이라면 다들 자라섬 체조송을 기억할 것이다. '자라자라자라자라 자.라.페스티발-' 원래 재즈엔 가사가 없는 거냐며 몇 가지 질문을 하다가 잠들어버린 내 동생들도 자라섬 체조송이 나올 때만큼은 기지개를 켜고 일어나서 그 누구보다 신명나게 몸을 흔들었다. 어찌나 흥겹게 흔들었던지 카메라에 잡히기까지 했을 정도다.
역시, 자라섬은 언제나 내게 잊을 수 없는 추억을 남겨주는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