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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집순 May 24. 2020

[어드밴스드_05]  밤 탈출

굴러가 어쨌든




나와 내 친구가 그 이상한 여행을 기획한 것은 퇴근 후 광화문의 어느 카페에서였다. 오랜만에 얼굴이나 보자며 만났는데, 우리 둘 다 의자에 축 늘어진 채로 무표정하게, 말도 없이 커피만 들이켰다. 쳇바퀴 같은 직장생활과 일상에 대한 푸념을 하다가 그가 말했다. 답답하다고, 어디든 떠나고 싶다고. 그래, 못할 것 없지. 떠나자. 그와 함께 한 일련의 여행은 그렇게 즉흥적으로 시작되었다.


계획이랄 것도 없었지만, 우리가 기획한 여행의 대강은 이랬다. 금요일 퇴근 후 접선해 차를 끌고 가까운 교외로 나간다. 행선지에 잠시 머물다가 날 밝기 전 돌아온다. 당시 나는 장롱 면허였기에 운전은 친구 담당, 차도 친구 아빠차였다. 늦은 밤부터 새벽 사이에 움직이기로 한 이유는 길이 막히지 않기 때문이었다. 콧바람 실컷 쐬고 돌아와도 주말 이틀을 온전히 쉴 수 있다는 것 역시 이 일정의 큰 장점이었다. 목적지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고 여행지에서 하고 싶은 일도, 서로 하고 싶은 얘기도 없었다. 대체 무엇으로부터 그렇게도 도망치고 싶었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만큼 탈출이 간절했다. 우리는 실로 가련한 직장인들이었던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야심 찬 ‘밤 탈출’은 운전에 대한 나의 많은 환상을 깨트려주었다. 그 첫째는 차가 있으면 어디든 갈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었다. 그건 불야성의 도시, 서울에 길들여진 우리의 순진한 착각일 뿐이었다. 그 오밤중에 서울 말고 불을 켠 근교 도시는 없었다. 그 시각에 불을 밝히고 있는 데가 있다고 해도, 그곳은 서울과 과히 다르지 않은 곳이었다. 둘째로 사라진 것은 계획 없는 즉흥 여행에 대한 낭만이었다. 즉흥 여행이라는 미명 하에 계획 없이 감행한 첫 밤 탈출에서 우리는 휴게소 우동으로 저녁을 때우고 서울보다 시끄러운 경기도의 한 24시간 카페에서 커피를 둘러 마시다 돌아와야 했다. 분 단위 일정표가 필요하다는 얘기가 아니다. 대략의 행선지라도 검색해보는 정도의 최소한의 성의는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산산이 부서진 많은 환상 중에서도 가장 처절했던 것은 '밤 바다'에 관한 것이 아니었을까. 통상 밤이라는 접두사를 붙이면 모든 단어는 조금 특별해진다. 아이유가 ‘낮 편지’가 아닌 ‘밤편지’를 노래하고 버스커버스커가 '여수 대낮 바다'가 아닌 ‘여수 밤바다’를 열창한 데에는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그래. 우리도 가자 밤바다로! 행선지는 만리포 해수욕장이었다. 그 많은 바다 중에 만리포가 낙점된 까닭은 만리포 해수욕장 바로 옆에 있는 천리포 수목원이 참 멋있었다는 말도 안되는 이유 때문이었다...


친구는 미친듯이 달리고 싶다며 시속 120km로 엑셀을 밟아 댔고 나는 내 플레이리스트를 틀어 놓고 노래를 불러제꼈다. 그렇게 도착한 새벽의 만리포 해수욕장에서 우리는 끝내 밤 바다를 보지 못했다. 물론 바다는 거기 그 자리에 있었다. 너무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았을 뿐... 카페에 갔던가? 조개 구이를 먹었던가. 기억도 잘 나지 않는다. 그저 사람이 없어 을씨년스럽던 모래사장과 바다, 아니 칠흑 같은 어둠만 생각난다.


몇 차례의 밤탈출을 통해 운전에 대한 환상 대부분이 연기처럼 사라졌지만, 그래도 마지막까지 질기게 살아 남은 로망이 있었다. 밤길을 달려 은하수 사진을 찍고싶다는 바람이었다. 그런데 이번엔 연수 선생님이 내 바람을 반대하고 나섰다.


“집순씨는 운전 배우면 어디 가보고 싶어?”

“글쎄요. 그런 거 딱히 없는데요.”

“생각해서 얘기 좀 해봐. 심심하잖아…”

“뭐… 별 잘 보이는 한적한데 가서 별 사진이나 찍고 싶네요. 아무튼 사람 없는데요. 가기 힘든데.”

“절대 안돼. 그건 아아-주 잘못된 생각이야.”

“아 또 뭐가요…”

“사람 없는데 가겠다는 생각 말야. 별 보려면 밤에, 깊은 산중에나 가야할 건데 그러다가 긴급 상황이라도 벌어지면 어쩔 거야. 무조건 사람 있는 데로 가야 돼.”


그런식으론 정말이지 단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다. 내가 누군가에게 반드시 도움을 받아야 하는 상황 말이다. 무턱대고 밤 탈출을 감행할 만큼 그즈음 나는 사람들에게 지쳐있었고, 사람만 만나지 않아도 대부분의 문제가 사라질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그건 한 가지 전제가 충족돼야 한다. 내가 혼자서 내 문제를 모두 해결할 수 있다는 전제. 여전히 내가 내 문제 대부분을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 오만한 인간이지만, 이제는 어렴풋이 안다. 누군가의 도움이 아니면 안되는 것들이 아주 가끔,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것을.


*덧, 밤 탈출 이야기


/밤 탈출 장소로는 생각보다 먼 곳을 선택해도 좋다. 새벽이라 차가 막히지 않기 때문에 예상보다 멀리 갈 수 있다. 충남부터 속초나 경남까지도 다녀왔었다.


/근교에 갈만한 곳으로는 파주 지혜의 숲을 추천한다. 24시간 오픈하는 서가가 있기 때문이다. 새벽에는 사람이 적어서 책을 읽기도 좋다. 물론 나는 졸다가 왔다… 북카페는 서울에 더 많으니 굳이 책읽으려 파주까지 갈 필요는 없다. 독서에 드라이브까지 즐기고 싶다면 갈만하다.


/밤이기 때문에 더더욱 안전운전이 중요하다. 졸음 방지용 껌을 꼭 챙길 것.


/여름에도 새벽엔 춥다. 밤 탈출시 여름이라도 반드시 겉옷을 준비하는 게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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