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러가 어쨌든
지리산에 이은 나의 두 번째 드라이브 장소는 안반데기였다. 강원도 강릉시 안반덕길, 해발 1,100m의 고산지대에 위치한 국내 최대 고랭지 채소 재배지다. 하고많은 산 중에 왜 안반데기냐고 묻는다면, 언젠가는 은하수 사진을 찍고 싶다는 바람 때문이다. 안반데기는 아름다운 은하수를 볼 수 있는 포인트로 유명하다. 아직은 밤에 산길을 운전할 배짱이 없어서 먼저 연습삼아 백주대낮에 가보기로 한 거다. 물론 은하수가 아니어도 안반데기는 너무나 아름다운 곳이다.
지리산에서 많이 수련했다고 생각했지만 강원도의 경사는 또 다른 차원이였다. 안반데기로 가는 길에 보면 아스팔트로 포장한 도로 옆에 흙더미를 쌓아 만든 둔덕이 군데군데 있다. 가파른 경사길에서 브레이크가 파손되는 경우 차를 물리적으로 멈출 수 있게 설치해 둔 것이다. 그렇구나, 이런 곳에서는 브레이크가 파손될 수 있구나. 후달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운전을 했다. 지리산 성삼재 드라이브에서 새근새근 잠이 들었던 강심장, 나의 절친은 그날도 천진난만한 얼굴로 내 옆에 앉아있었다. 그리고 하늘에선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울엄마는 항상 내게 말했다. 비 오고 눈 올 땐 운전하는 거 아니라고. 근데 엄마, 운전하다가 비가 오면 어떡해?
지리산에선 다행히 뒤에서 따라오는 차가 없어 눈치 볼 필요가 없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SUV 한 대가 내 차를 뒤따랐다. 경사길이 무서웠지만, 뒷차를 생각해 나름대로 속도감 있게 언덕길을 올랐다. 그런데 사이드 미러로 본 뒷차가 조금 이상했다. 비상등을 켠 채로 올라오고 있었던 것이다. 뭐가 문제가 있나? 하지만 그 차는 멈춰 서지도, 경적을 울리지도 않고 비상등을 켠 채 조용히 나를 뒤따르기만 했다. 나중에 다른 선배 운전자들과 얘기를 하다 알게 됐다. 그 비상등은 나더러 빨리 좀 가달라는 의사표시였다. 하지만 뒷차 운전자는 끝까지 경적만큼은 울리지 않았다. 정말 부처님 같은 분이었다. 직접 만나 감사하다고 전할 순 없지만, 그래도 이 글을 빌려 인사를 전하고 싶다. 진짜 감사했습니다!
그렇게 누군가의 '소리없는' 양보와 배려 속에서 나와 친구는 즐거운 안반데기 여행을 마쳤다. 고속도로 귀경길은 어느덧 늦은 밤이었다. 그런데 터널이 가까워지는 어느 지점에서 앞에 가던 차들이 온통 비상등을 켜기 시작했다. 뭣도 모르고 나도 비상등을 켰다. 혹시 앞에 사고가 났나 했는데, 지나고 보니 그것도 아니었다. 이것 역시 나중에 그 의미를 알게 됐다. 터널 앞이나 병목 구간 등에서 차속이 급격히 느려질 때 비상등을 켜서 뒷차들에게 조심하라고 알려주는, 운전자들의 신호였던 것이다. 그 이후로도 종종 터널 앞에서 단체로 비상등을 켜게 될 때가 있었다. 고요하고 침착하게 차들이 서로에게 신호를 보내고 있는 그 모습은 언제 봐도 참 안심되고 고마운 풍경이다. 다들 알다시피, 도로 위엔 무법자도 많고 욕설과 보복운전, 난폭운전도 있다. 하지만 그런 것들만 있는 건 결코 아니다. 단지 요란스럽지 않게 존재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