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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집순 Apr 19. 2020

[어드밴스드_02] 진짜 갔다 지리산

굴러가 어쨌든




굴러가 어쨌든 <연수편>을 작성할 당시 나는 운전에 대해 이렇게 요약한 바 있다.


“갈 땐 엑셀을 밟고 멈출 땐 브레이크를 밟는 것이다.”

.

.

.

그 말을… 취소한다…



지리산 성삼재 드라이브 인증. 벌써 2년 전 일이다.


북악스카이웨이 전지훈련 2회, 남한산성 전지훈련 1회, 로드뷰를 통한 이미지 트레이닝을 마치고, 드디어 결전의 날이 밝았다. 차를 끌고 지리산에 오르는 날 말이다. 평지를 지나 산으로 올라가는 도로에 오르자 연초록으로 뒤덮힌 길이 나를 반겼다. 물론 내 눈엔 그런 낭만따위가 끼어들 여지가 없었다. 본격적인 경사로에 진입하기 앞서 마음 속으로 부장이 한 말을 주문처럼 되뇔 뿐이었다. “천천히, 무조건 천천히 올라가면 된다.”


우려와는 달리 실전은 철저히 나의 계획대로 진행됐다. 일부러 느리게 가지 않아도 산길은 애당초 나 같은 초보가 속도를 낼 곳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늘이 도왔는지 길에 차도 거의 없었다. 만에하나 이 아슬아슬한 2차선 도로 반대편에서 관광버스가 덮치듯 달려왔다면? 내 뒤로 길게 늘어선 관광버스와 행락객들이 빨리 좀 가라며 일제히 경적을 울렸다면? 아… 정말 상상도 하기 싫다. 신께서 이 치기어린 초보를 진정 가엾게 여기신 게 틀림없었다.


하지만 인간을 하나부터 열까지 도와준다면, 그건 아마 진정한 신이 아닐지도. 천지신명이 나를 도와주신 건 딱 성삼재 주차장에 주차를 할 때 까지였다. 즐거운 산행을 하고 돌아와보니 텅 비어있던 주차장은 어느새 차로 꽉 차 있었다. 이 협소한 공간에 다들 어쩜 이렇게도 반듯하게 주차를 한걸까? 아니 그보다 이 모든 사람들은 여기서 어떻게 차를 뺄 계획이지?


그 구불구불한 산길을 오를 때에도 이렇게 어렵진 않았다. 핸들을 아무리 좌로 돌리고 우로 돌려도 도저히 빠져나갈 각이 안나왔다. 인형 뽑기 기계처럼 위에서 커다란 집개가 내려와 내 차를 들어내지 않으면, 차를 빼기란 불가능해 보였다. 그 사이 등산을 마치고 돌아온 행락객들이 하나 둘 모여들어 내가 차 빼는 것을 걱정스럽게 지켜보… 구경하기 시작했다. 주변에 사람이 늘어나니, 혹시 그들을 다치게 할까봐 나는 더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때였다. 귀인이 등장한 것은. 등산객 한 분이 주차요원을 자처해 주신 것이다. 나는 귀인의 신호에 따라 후진 기어와 전진 기어를 번갈아가며 엑셀을 밟아댔고 구경하는 사람들은 그때마다 비명을 지르고 입을 틀어막았다. 그들이 왜 그러는지는 차 안에 있는 나로선 알 길이 없었다. 아니, 알고 싶지 않았다.


차를 무사히 빼내고 나와 친구는 귀인께 고개 숙여 감사의 인사를 드렸다. 내 미천한 운전실력이 부끄러웠지만 초보에겐 두꺼운 낯짝도 능력이다,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자 이제 이 구불구불한 길을 다시 내려가기만 하면 된다. 올라올 때와 반대로, 나는 엑셀 대신 브레이크에 발을 올렸다. 마른침을 삼켜가며 핸들을 잡고 있는 나를 응원하듯, 친구는 내가 본 것 중 가장 용감한 모습을 보여줬다. 내 차에서 잠이 든 것이다. 친구야, 네가 잠든 사이 무슨 일이 벌어졌었는지, 너는 아마 평생 모르겠지?


지리산 운전의 복병은 커브길이 아니었다. 그럼?


세상 모르고 잠든 친구를 태우고 산길을 벗어나 평탄하게 쭉 뻗은 도로로 진입했다. 해가 뉘엿뉘엿 지는 텅 빈 도로를 홀로 달리는 이 기분은 뭐랄까, 고독을 씹을 줄 아는 ‘으른’이 된 것 같은 딱 그런 느낌…? 그렇게 나 혼자 눈빛이 막 그윽해져서는 도로를 달리는데, 눈앞이 정말 아득해지기 시작했다. 날이 저물어 기온이 내려가면서 차 창 가득 김이 서리기 시작한 것이다. 뭐야, 이런 건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다고. 커브도, 경사길도 아닌 수증기 때문에 운전에 애를 먹을 줄 누가 상상이나 했겠냔 말이다. 그래, 늘 이런 식이지. 아무리 기본에 충실하고 또 충실해도 예상치 못한 응용문제나 신유형 문제로 허를 찔러대는 거.


기억을 더듬어 에어컨을 켜려고 했지만 핸들을 두 손으로 잡고 있기도 바쁜 내겐 무리였다. 친구를 깨워 도움을 청했을 때엔 김이 이미 많이 서려 에어컨으론 단번에 해결되지 않았다. 맘이 급해져서 앞뒤 창문을 다 내렸다. 의도와는 달리, 습한 바깥 공기가 확 밀려들어오면서 앞유리는 아예 허얘져 버렸다. 도로에 차가 없었기에 망정이지 정말 큰일 날 뻔했다. 네 개의 창문으로 쏟아지는 바람을 온 몸으로 얼마나 맞았을까, 창문은 비로소 맑아지기 시작했다. 그 후로 나는 장거리 운전을 하기 전날 밤이면 시동을 걸자 마자 차창이 온통 하얘지는 악몽을 몇 번이나 꿨다.


내 생애 첫 드라이브 목적지였던 지리산 성삼재. 말도 안되는 도전이었지만 많이 배운 것도 사실이다. 커브가 심한 경사길 운전하는 스킬이나 김 서림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등등... 또한, 운전은 연수만으론 결코 완벽해질 수 없다는 것, 오직 경험을 통해서만 습득해야하는 것들이 많다는 걸 확실히 깨달았다.


근데 말이다. 그걸 꼭 지리산 성삼재까지 가서 배워야 했던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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