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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집순 May 02. 2020

[어드밴스드_03] 맨몸으로 도로를 달릴 순 없으니까

굴러가 어쨌든




올해로 70대 후반의 순천 유마담. 그녀가 운전을 시작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20여년 전, 50대 중반에 접어들었을 때였다. 젊은 시절에도 안했던 운전을 왜 그 나이에 시작했느냐고 궁금해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별다른 이유는 없다. 그냥 하고 싶어서 시작한 거지 뭐. 그래서 지금은 운전을 얼마나 자주 하냐고? 3년 전에 뽑은 신차의 주행거리가 10만km를 넘었다, 정도로 설명하면 될까? 종종 순천과 오산을 운전으로 왕복하는 지구력과 에너지의 소유자로, 계모임 친구들을 싣고 산으로 바다로 놀러 다니는 게 그녀의 낙이다.


지리산 성삼재에 오르기 전날 밤 순천 유마담의 집에서 하루를 머물렀다. 내 친구의 외할머니이신 그녀는 우리가 성삼재로 가기 직전까지도 “내 차로 내가 태워다 주겠다”며 우리의 무모한 도전을 만류하셨다. 그런 그녀의 반대가 내겐 신선했다. 아무래도 내 또래에겐 할머니가 운전하시는 게 흔치는 않은 일이니까.


그런데 생각해보니 아주 가까이에 ‘할머니 드라이버’가 또 있었다. 자타가 공인하는 우리 집안 베스트 드라이버인 고모할머니다. 올해로 72세인 그녀는 47세에 문득 운전을 시작하신 이래 전국을 주유하셨다. 그렇게 많은 여행을 다녔지만 무사고 경력을 자랑한다. 여러 사람이 각자의 차를 끌고 어딘가로 함께 움직일 때, 선두엔 늘 고모할머니의 차가 있을 정도로 길눈도 밝다. 그런 고모할머니께 여쭤봤다. 왜 운전을 배운 거냐고. 그런데 순천 유마담과 같은 답이 돌아왔다. “그냥, 그냥 하고 싶어서.” 아니, 세상에 ‘그냥’이 어딨냐고요! 고모할머니, 그럼 운전 배우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 때는 언제에요? 이렇게 물어봤다. 그랬더니 그녀가 음… 하고 잠시 고민하다가 꿈꾸듯 말했다.


“너어무 좋은 길이 많잖아. 번화한 시내 사이로 쭉 뻗은 도로나 전국으로 뚫린 고속도로 같은 거. 근데 걸어서는 못 가잖아 그 길을. 차를 타면 그 길 한 가운데를 달릴 수 있으니까. 그렇게 좋은 길을 달릴 때 기분이 정말 좋지. 내가 태어나서 제일 잘한 게 바로 운전 배운 거야.”


두 할머니들의 대답을 듣고 나서, 나는 이따금 그 답변의 의미와 무게에 대해 생각에 잠겼다. 나보다 인생을 두 배쯤 더 사신 그 분들이 뭔가를 할 때엔 분명한 이유나 목적이 있을 거라고 어렴풋이 생각했다. 취미 생활을 배우러 가는데 차가 필요했다 거나, 일 때문에 운전을 해야했다거나, 집에만 있는 게 답답해서 자유를 느끼고 싶었다거나, 최소한 재밌어보여서라는 이유라도 있어야하는 거 아니냐고. 하지만 그녀들의 대답은 내가 상상한 것과는 달리 담담하고 소소한 것이었다. 그냥, 어느 날 하고 싶어서. 그리고 그렇게 이유없이, 아무런 목적이나 목표도 없이 시작한 일이 수십년 후 그녀들의 삶을 바꿔 놨다. 과거 운전을 막 시작할 때의 그녀들로선 상상조차 할 수 없을 만큼.


최근 수 년 사이, 나는 새로 배우기 시작한 것이 많아졌다. 운전을 시작했고, 다도를 배우는 중이고 극본 쓰기 수업에도 나간다. 그것도 모자라 얼마 전엔 온라인 미술 강좌도 신청했다. 모두 상당한 시간과 비용이 든다. 그런데 이중 그 어떤 것도 사는데 반드시 필요한 일은 아니다. 당장 배우지 않으면 큰일 나는 것도 아니다. 솔직히 얘기하자면 너무 하고 싶어서, 엄청 좋아서 시작한 것도 아니다. 어느 날 문득 한번 해볼까? 하는 조금은 충동적으로 시작한 게 대부분이다. “왜 그걸 배워? 뭐가 특별한 게 있어? 배워서 그 길로 가보게?” 주위에서 이런 질문을 하면 나도 할 말이 없다. 나 역시 내가 도대체 왜 이런 것들을 배우는지 알고 싶다.


수업을 들을 땐 열중하고, 때론 즐겁기도 하다. 그래도 헛헛한 기분을 지울 수 없는 게 사실이다. “이거 해서 뭐하게?” 하는 생각이 무시로 든다. 내가 현재의 불안을 잊기 위해 허덕이듯 새로운 걸 ‘수집’하는 건 아닐까? 아무것도 안 해도 되는데, 내가 나를 너무 가혹하게 대하고 있는 건 아닐까. 아이러니한 건 그런 고민 속에서도 그만두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이걸 해서 뭘 할진 모르겠지만, 일단 다음주에는 운전을, 다도와 글쓰기 수업을 나가고 싶은 게 지금의 내 마음이다.


적지않은 나이에 운전을 시작한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계속 붙들고 있다가 내 고민을 풀 작은 단서를 엿본 듯 했다. 유마담도, 고모할머니도 운전을 시작할 땐 사는데 필수불가결한 일은 아니었다. 운전을 시작해서 무슨 전문 레이서가 된 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게 무슨 대수인가. 그녀들의 일상은, 삶은 운전을 배우기 전과 후로 명확하게 달라졌다. 그냥 문득 시작한 운전이 태어나 가장 잘 한 일이 될 만큼 말이다.


그러니까 지금 그 의미를 모른다고 해서 함부로 그 일을 무시해선 안될 일이다. 성급하게 소용을 묻는 건 금지다. 정말이지, 소용이란게 뭐 그리 대수란 말인가. 아무런 의미 없다고 무시하는 일들이 실은 우리 인생에서 가장 귀하고 중요한 것일지도 모른다.


이 글에 대해 생각하고 쓰는 내내 떠올랐던 글귀가 있다. 그 구절로 이 글을 마무리해볼까한다. 내가 너무너무너무 좋아하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수필,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시작하는 작가의 말이다.


나는 달려가면서 그저 달리려 하고 있을 뿐이다.

나는 원칙적으로는 공백 속을 달리고 있다. 거꾸로 말해 공백을 획득하기 위해서 달리고 있다, 라고 하는 것이 맞을지도 모른다. 그와 같은 공백 속에서도 그 순간순간의 생각이 자연스럽게 스며들어온다. 당연한 일이다. 인간의 마음속에는 진정한 공백 같은 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의 정신은 진공을 포용할 만큼 강하지도 않고 또 한결 같지도 않다.

그렇다고 해도 달리고 있는 나의 정신 속에 스며들어오는 그와 같은 생각(상념)은 어디까지나 공백의 종속물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내용이 아닌, 공백성을 축으로 해서 성립된 생각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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