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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집순 Apr 08. 2020

[어드밴스드_01] 지리산을 간다고?

굴러가 어쨌든




대체 무슨 생각이었을까.


아니 그보다, 생각이 있긴했나?


장담컨대… 난 아무 생각이 없었던 거다.



발단은 지극히 정상적이었다. 운전대를 잡으니 당장 여행을 떠나고 싶어진 것이었다. 애초에 운전을 배운 이유가 무엇인가! 여기저기 차를 끌고 놀러다니기 위함 아니었던가? 차를 끌고 가는 첫 여행. 목적지로 어디가 적합하려나. 서울에서 가깝고 길도 잘 닦인 곳이 좋겠지? 나 역시 상식을 가진 성인으로서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내 첫 여행지는 지리산 성삼재가 돼 있었다. 성삼재가 어디인고. 전남 구례군 산동면 좌사리, 높이 1,102m에 위치한 지리산 능선의 고개다. 이 글을 쓰는 지금 이 순간까지도 왜 내 첫 드라이브 목적지가 성삼재였는지 기억이 나지도, 이해가 되지도 않는다. 아 왜 초보가 차를 끌고 지리산엘 가냐고!


뭐, 이미 벌어진 일 각설하고... 코스는 이랬다. 순천에 있는 친구 할머니 댁에서 하루 머물고, 다음날 쏘카를 끌고 성삼재까지 올라간 후, 걸어서 노고단을 찍고 내려오는 것. 버스가 자주 다니지 않아 차를 타고 가면 편하지만, 구불구불한 경사길이 초보에겐 버거운 코스다.


내가 지리산에 가겠다는 계획을 밝히자 주변 사람들은 정확하게 절반으로 갈렸다. 한쪽은 의외의 응원파였다. 대표 인물은 우리 부장이었다. 부장은 “뒤에서 빵빵거리건 말건 비상등 켜고 천천히 올라가면 돼. 절대 속도 내지 말고 천천히만 가면- 야, 너두 할 수 있어!” 다른 한 쪽은 물론 반대파였다. 그들은 하나같이 이렇게 입을 모았다. 미친 거 아니냐고. 목숨이 몇 개 더 있냐고.


막 운전을 시작한 나는 유아적 만능감에 젖어있었다. 하지만 순천행 차표를 끊고 나니 슬슬 불안함이 엄습해왔다. 나야 그렇다치고, 이런 인간이 운전하는 차의 조수석에 앉겠다는 죄 없는 내 친구는 어찌 되는 건지... 지금까지는 다행히 절벽이 나를 부른 적은 없었는데(연수편 4회 참조) 하필 지리산의 장엄한 절벽이 나를 부르면 그땐 어떡하지?


하루하루를 속 태우며 나는 네이버 로드뷰를 붙잡고 있는 시간이 늘어났다. 내가 운전해야 할 산길을 네이버 로드뷰를 통해 가상으로 미리 밟아보는 것이었다(!) 그야말로 로드뷰의 새로운 발견이었다... 다 똑같은 나무, 다 똑같은 비탈길이었지만 그거라도 하지 않으면 더 불안했다. 그러던 어느 날은 정말이지 안되겠다 싶어 퇴근후에 집에 가방을 던져 놓고 쏘카를 빌렸다. 우리집서 가까운 한 한적한 언덕길로 가 경사길, 커브길 운전 연습을 해볼 요량이었다.


경사 연습은 고사하고 운전대 앞에 앉은 것 만으로도 온 몸이 얼어붙고 식은 땀이 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포기할 수는 없었다. 칼을 빼 들었으면 두부라도 잘라야지! 나는 비장한 표정으로 내비게이션에 목적지를 입력했다. '북악…스카이…웨이'. 그렇다. 연인들의 드라이브 코스로 명성이 자자한 그 북악스카이웨이.


북악스카이웨이 마의 커브구간


“아유 길이 어둡네. 지리산은 아침에 가니까 훨 낫겠지? 그래도 평일 밤이라 차가 없어서 진짜 다행이다. 이렇게 열심히 연습하는데 지리산에서 무슨 일이야 있겠어. 우리 부장 말대로 비상등이라도 켜구 천천히 올라가면 되지. 근데… 이 길이 맞나… 뭐야? 저 신호등은 왜 계속 깜빡여?? 고장 난 거 아냐??? 가라는 거야 말라는 거야... 근데… 나… 지금 누구랑 얘기하냐?”


아... 내가 긴장을 하면 혼잣말을 하는구나. 30여 년 만에 새로운 사실을 깨달으며 나는 어두운 북악스카이웨이를 그렇게 수다스럽게 달렸다. 아니, 달렸다기 보다는 이 글의 제목대로 굴러갔다고 표현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어설프게, 천천히. 정확히는 시속 30km 안팎으로.


코너를 지나면 또 코너, 언덕을 넘으면 다시 언덕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코너링에서 속도 조절하는 것을 어려워하는 나인데, 경사까지 겹치니 아, 운전이 진짜 어려운 거구나 싶었다. 체감상 속도가 너무 빠른 것 아닌가 했지만 속도계는 시속 30km, 때로는 20km까지도 떨어졌다.


그때 내 차를 바람처럼 스쳐 지나가는 이들이 있었다. 그들은 바로 쫄쫄이 복장에 사이클을 탄 사람들이었다. 나… 방금 자전거에 추월당한 건가? 하... 지리산... 갈 수 있는 건가? 그것보다... 오늘 집에 돌아갈 수 있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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