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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집순 Jul 26. 2020

[어드밴스드_12] 공유차로 대형사고를 냈다

굴러가 어쨌든


선생님 죄송해요.

저, 결국엔 엑셀을 밟았어요.

.

.

.

올초 교통사고를 냈다. 그것도 대형사고를. 운전선생님은 다급할 때 꼭 브레이크를 밟으라고 신신당부했었다. 브레이크를 밟으면 그냥 놀라는데서 끝나지만, 엑셀을 밟으면 그대로 큰 사고가 나고야 만다고. 선생님의 주의에도 불구하고 나는 일촉즉발의 순간에 온 힘을 다해 엑셀을 밟았다. 그 사고로 차는 반파됐다. 그런건 상관 없었다. 문제는 조수석에 타고 있던 엄마가 다친 것이었다.


그날 나는 서울로 올라온 엄마를 모시고 경기도로 나들이를 다녀오던 길이었다. 밤 8시경 한적한 도로에서 비보호 좌회전을 하던 중 빠르게 달려오던 직진차량에 차 옆구리를 받쳤다. 아직도 사고가 나는 장면을 상상하면 차창 밖으로 너무도 크고 지나치게 가까워 보이던 상대 차량의 불빛과 엔진의 굉음이 생각난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차가 돌고 차 안에 달린 에어백들이 일제히 터졌다. 그리고 너무 길게 느껴지던 잠깐의 정적. 엄마가 흐느끼듯 신음하고 있었다. 엄마는 이 사고로 응급실에 실려가 새벽에 수술을 받을만큼 크게 다쳤다.


참으로 잔인한 타이밍이었다. 사고가 나기 직전, 나는 엄마와 이런 얘기를 하고 있었다. 나 운전 배우길 참 잘한 것 같다고, 이렇게 놀러나오니 얼마나 좋으냐고. 그 말을 내뱉자 마자 신은 내게 남들은 한 평생 겪지 않을 수도 있는 사고를 선사한 것이다.


큰 사고를 당하면 누구도 온전히 정신을 붙잡기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사고 직후엔 그 어느때보다 정확한 판단력을 요하는 살벌한 현실이 펼쳐진다. 공유차를 타고 가던 중에 난 사고였으니 우선 쏘카에 사고 접수를 해야했다. 나는 구급차에 앉아 떨리는 손으로 쏘카에 사고 접수를 했다. 이윽고 엄마가 실려간 경기도의 병원에서 수술은 다음날에나 가능하다는 얘기를 듣고 사설 구급차를 불러 서울의 큰 병원으로 가기로 결정을 내렸다. 어렵사리 병원을 옮겼지만 어쨌든 거기선 곧바로 수술을 할 수 있었다.


이 단순한 사고 경위 안에 담긴 수 많은 사연 중 무엇을 어떻게 풀어야 할까. 엄마는 식은 땀을 흘리며 고통스러워하는데 거리의 차들은, 고발 프로그램에 나온 그 모습 그대로, 구급차에게 길을 잘 비켜주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 내 스마트폰에선 끊임없이 알람이 울리고 있었다. 사고 처리를 했음에도, 대여 시간이 지났으므로 연체료를 부과한다는 쏘카의 알람이 날아오고 있었던 거다. 모든게 엉망진창이었다.


얼마가 들어도 좋으니 엄마가 제대로 치료 받길 원했다. 하지만 그 '얼마'가 얼마나 될지 가늠조차 되지 않아 불안했다. 다행이 공유차를 빌릴 때엔 사고에 대비해 보험을 가입하도록 돼 있다. 엄마와 나의 치료비는 쏘카를 통해 가입한 보험사와 상대방 차량 보험사에서 모두 보험처리가 됐다. 내가 문 것은 차 수리비의 약 15% 정도였다. 보험사에 사고 접수를 해두면 치료를 받는 중에는 비용을 낼 필요가 없다. 모든 치료가 끝난 후에 보험사에 서류를 제출하면 알아서 정산을 해준다. 그러니까 돈 걱정 말고 뭐든 할 수 있는 치료를 제대로 받는 것에만 신경쓰면 된다. 


모든 경험은 교훈을 남긴다. 하지만 교통 사고는, 잘 모르겠다. 사고가 나기 직전 그 찰나에 어떻게 판단해야하는지는 여전히 전혀 알수 없다. 그저 조금 더 주의하며 운전하자고 다짐하는 수 밖엔. 물론 아무리 다짐하고 다짐해도 또다시 그런 상황이 닥치면 나는 브레이크 대신 엑셀을 밟을지도 모른다. 


사고에 대해 알게된 것은 그닥 없지만, 모든 사람이 그렇듯, 나 역시 주변 사람들이 내게 얼마나 소중한지를 새삼 깨달았다. 나 스스로도 약간은 미스테리하게 생각하는 점이지만, 난 엄마가 병원을 퇴원하고 무사히 회복한 지금까지도 울지 않았다. 당시 내겐 슬픔이나 눈물 같은 건 너무도 사치스럽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응급실에 혼자 앉아있을 땐 잠시 목이 메기도 했다. 하지만 사고를 낸 장본인인 주제에 감상에 빠지는 건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눈물을 잊어버린 나를 대신해 울어준 것은 친구들이었다. 물티슈부터 실내화, 물통과 컵까지 생각지도 못한 물건들을 양손에 바리바리 싸들고 와선 아무 말도 못하고 눈물부터 터지던. 집으로 찾아와 우리 엄마를 안고 같이 울어주던 나의, 오랜, 친구들.


처음엔 차마 연락도 못하던 가족들은 한 명씩 두 명씩 조심스레 전화를 걸어왔다. 감사하다고, 감사하다고 같은 말만 반복하던 우리 할머니, 말없이 그저 내 목소리만 듣고 있던 이모, 다짜고짜 계좌번호를 부르라고 다그치던 작은 삼촌. 그래도 내게 가장 위로가 됐던 건 역시 무뚝뚝한 우리 큰삼촌의 말이었다. 온집안 사람들에게 전화를 걸어 "집순이에게 연락하라"고 종용하던 큰삼촌은 결국 내가 전화를 걸 때까지 연락을 하지 않았다. 풀 죽은 내 목소리에 삼촌은 대뜸 밝게 말했다. 사고 냈다고 운전 안하란 소린 하지 않는다고. 이제 넌 비보호 좌회전에서는 영원히 사고가 나지 않을거라고. 언제나 혼자서 참 잘 헤쳐나왔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나는 단 한순간도 혼자 걸어온 적이 없었다. 언제나 내 곁엔 이들이 함께였다.


그리고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기 전부터, 사고가 나는 그 순간까지도 내 옆에 있었던 사람.


나의, 엄마.


사고 직후 엄마는 내 얼굴을 만지며 말했었다.

"어떡하니, 어떡해..."


처음엔 사고가 나서, 너무 놀라서 한 말인 줄 알았다. 그런데 나중에 거울을 보고야 알았다. 그게 얼굴에 작은 찰과상을 보고 말이었다는 걸. 


엄마는 창자가 끊어지는 고통 속에서도 얼굴에 손톱만한 상처를 걱정하고 있었다. 그 걱정이, 그 사랑이 사고 반년이 지난 지금 이 글을 쓰는 나를 울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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