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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임대주택은 내가 먹을 떡이 아니었다

서울도시주택공사(SH)에서 주관하는 장기전세주택 입주자 모집 공고가 떴다. 지난 2년간, 이 공고의 입주자 선정 시 1순위가 되기 위해 주택청약종합저축을 매달 꾸준히 납입해온 터였다. 때마침 내가 살고 있는 은평구에서도 몇몇 아파트 단지가 장기 전세 입주자 모집을 하고 있었다. 나는 은평 뉴타운에서 나온 장기전세주택 중에서 교통과 생활 편의시설 등을 고려했을 때 가장 우수한 위치라고 생각되는 단지에 4인 가구로 체크해서 과감하게 지원했다.


그렇게 보름 정도의 시간이 지났다. 서류심사 대상자 발표가 났고, 수많은 사람들의 이름이 나열된 명단 속에서 나의 이름도 찾아볼 수 있었다. 그러나 내 이름이 포함된 명단을 보고 있는 나는 기쁘지 않았다. 지난 2년간, 서울에서 집을 사지 않고도 살 수 있을 거란 희망의 토대가 공공임대주택의 입주였고, 그것이 현실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경험하고 있는 순간이었지만 나는 전혀 기쁘지 않았다.


내가 장기전세주택 입주자 선정을 위한 서류심사 대상자가 되었지만 기쁘지 않았던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우리 집은 처음부터 내가 지원한 아파트 단지에 입주자로 선정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SH가 마련해 놓은 입주자 선정 기준의 가구원 수 대비 소득기준을 넘어서 있었다. 아내 뱃속에서 자라고 있는 딸아이를 포함한 우리 집의 가구원수는 3인이었지만 소득기준을 넘어서기에 4인 가구로 체크해서 지원해본 것이었다.


지난 시간, 장기전세주택 입주가 서울에서 살아온 희망의 토대였기에 안될 걸 알면서도 지원해본 것이었다. 청약저축 납입 횟수가 24회가 넘어서고, 그때서야 비로소 장기전세주택의 입주에 대해 적극적으로 알아보았다. 그리고 우리가 나라가 지원하는 대부분의 공공임대주택에 사실상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그것이 단칸방 생활을 하며 품었던 희망 중 하나였기에 지원 한번 안 해보고 마침표를 찍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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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주택이나 장기전세주택과 같은 공공임대주택을 이용하면 서울에서 집을 사지 않고도 걱정 없이, 만족스럽게 살아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가지고 있는 재산의 대부분을 집이라는 물건에 쏟아붓고, 대출금 때문에 20년이고 30년이고 허덕이는 삶을 살지 않으려면 공공임대주택을 통해 나라가 지원해 주는 주거정책의 수혜자가 되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우리는 공공 주거정책의 혜택을 받을 수 없었다. 삶을 살아가면서 체감하는 느낌은 충분히 나라의 지원을 받아야 할 위치의 신혼부부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적극적으로 공공임대주택에 입주하기 위해 알아보니 우리 부부는 공공 주거정책의 사각지대에 놓인 사람들이었다. 소득 수준과 그에 따른 개별 소득의 산정으로 철저하게 나누어지는 공공임대주택의 지원 조건에서 우리는 커트라인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나는 끊김 없이 계속 근로를 한 근로자였지만 아내의 경우는 이직의 과정에서 10개월의 공백 기간이 있었다. 그런데 개별소득의 산정에서 이런 것들은 반영되지 않았다. 재취업을 했으면 앞으로 벌어들일 소득이 소득 산정의 기준이었다. 이전에 돈을 못 벌었고 그래서 어떻게 살았고 따위는 고려 사항이 아니었다.


공공임대주택에 입주하기 위한 조건은 생각보다 까다로웠다. 형식적으로 구분된 철저한 기준에서 우리 부부는 애매하게 커트라인을 벗어나 있었다. ‘맞벌이를 하지 말았어야 하나...’, ‘아내의 재취업이 조금 더 늦었어야 하나...’, 커트라인의 언저리에서 살짝 벗어나 있는 우리의 상황을 보고 있으면 누릴 수 없는 희망을 품었던 지난 세월이 후회스럽기도 했다.


하지만 공공임대주택에 입주하기 위해 벌어야 할 것을 안 벌고, 아내 재취업의 시점을 임의로 바꿀 수는 없는 거였다. 살아야 하는 것을 제대로 사는 것이 우선이지 안 되는 것을 억지로 하려고 꼼수나 쓸 이유가 없었다. 막연했지만 공공 주택 입주의 희망을 품으며 시작한 서울에서의 단칸방 신혼생활은 그 삶 자체로 의미가 있었다. 살림을 최소화하는 미니멀 라이프 속에서도 알콩달콩한 신혼의 즐거움을 느낄 수 있었고, 다시 오지 않을 행복한 순간을 보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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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생각이 미치니 다른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것은 공공임대주택에서의 삶, 자체에 대한 회의였다. 막연하게 생각했던 공공임대주택에서의 삶은 장밋빛 내일이었지만 현실을 자각하고 냉철하게 생각해본 임대주택에서의 삶은 긍정적이지 않았다. 어차피 공공 주택을 임대로 살아도 소득이 높아지면 그곳에서 계속해서 머물 수 없었다. 공공임대주택의 수혜자가 되고 싶으면 나라가 정해놓은 자격기준에 맞게 자신의 삶을 맞추어 가야 했다.


자녀를 더 낳아서 가구원수를 늘리거나 가구의 소득이 더 늘어나지 않도록 나름의 수단을 강구해야 하는 등, 삶이 발전하는 쪽으로 생각이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공공임대주택에 살고 있다는 현상을 유지하기 위해 이상한 잔머리를 굴려야 했다. 싫었다. 나라의 혜택을 받기 위해 잔머리나 굴려야 하다니... 현실 자각 속 깊은 회의의 끝에서는 실망만이 남았다.


그래서 집을 사야겠다고 생각했다. 깊은 실망 속에서 바닥까지 떨어진 집에 대한 관념은 소유라는 개념을 생각하며 반전을 이루었던 것이다. 이제는 더 이상 1년 또는 2년마다 이사를 다니고 싶지 않았고, 분쟁이 생기지 않을 좋은 임대인을 만나야 한다는 부담감도 가지고 싶지 않았다. 내 집을 마련해서 내가 꿈꾸는 데로, 내가 생각한 데로 자유롭게 내 삶을 만들어가고 싶었다.


그러나 집을 사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고 해서 당장 마음에 드는 집을 살 수는 없었다. 돈도 없었지만 새로 지은 아파트에 들어가려면 청약이라는 것에 당첨이 되어야 했다. 하지만 가족의 수도 많지 않은 태아를 포함한 3인 가구의 구성원이 이제 겨우 2년이 조금 넘게 청약통장의 납입 횟수를 채워 온 정도로 서울의 신축 아파트를 분양받는다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였다. 일반분양이든, 신혼부부 특별분양이든 우리에게는 모두 해당사항이 없었다.


다시 집에 대한 관념은 우울한 바다를 항해하고 있었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한동안 감을 잡을 수 없었다. 그렇게 스스로를 자책하며 끝없는 자괴감에 몸부림치던 어느 날, 진정으로 원하는 삶이 무엇인지를 생각한 머리는 현실을 직시한 눈을 통해 내가 가야 할 길을 보여주었다.


아내와 나는 아파트 청약에 당첨되기만 하면 서울이든, 경기도든 어디에서라도 살겠다는 마음이 아니었다. 우리는 다른 지역이 아니라 서울에서 살고 싶었다. 그것도 단칸방이지만 신혼생활을 시작한 지금의 우리 동네에서 살고 싶었다. 오래된 것과 새로운 것이 조화롭게 어우러지는 정감 가는 동네에서 느끼는 생활 속 즐거움을 계속해서 느끼며 살고 싶었다. 자주 가는 맛집과 카페 그리고 거리에서 얻는 행복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내가 가야 하는 길은 내 집 마련을 위해 아파트에 목매는 것이 아니었다. 내가 해낼 수 있는 것으로 내가 원하는 것을 추구하면 되는 것이었고, 그때서야 비로소 서울에 살고 있는 사람들 모두가 아파트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내 눈에 보이기 시작한 것이 신축빌라였다. 수십 년간 가족이 걱정 없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잘 지은 신축빌라를 소유하는 것, 그것이 내가 가야 할 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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