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월세라는 선택

임대료 인상의 속내를 드러내는 임대인 그리고 임차인의 거주 안정에는 관심이 없고, 어떻게든 이사를 시켜서 부동산 중개 수수료를 챙기려는 부동산 중개인 겸 관리인, 이들이 1년을 계약하고 만기가 다가오는 우리의 첫 신혼집을 둘러싼 관계인들이었다.


싫었다. 자기들 뱃속 채우기에만 혈안이 되어 있는 이들과 더 이상 관계를 맺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마음은 결정을 했으나 할 일은 남았다. 그것은 이사 갈 집을 알아보는 것이었다. 계약 만기를 한 달 반 정도 남긴 시점에서 나는 다시 두꺼운 외투를 걸치고, 거리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예전부터 찍어둔 곳이 있었다. 지금 살고 있는 집에서 거리로는 채 1km도 떨어지지 않은 곳이지만 좀처럼 생활권 안에서 발걸음을 할 일이 없는 구역이었다. 모텔과 원룸 건물이 밀집한 지역, 그런데 역은 1 ~ 2분이면 도착할 수 있는 초역세권이었다.

왠지 이곳이라면 우리가 이사할 집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눈앞에 보이는 부동산 사무실에 들어갔다. 그곳에는 짧은 커트머리의 중년의 아주머니가 앉아 전기난로 위에 양손을 펴고 불을 쬐고 있었다. 그녀는 친절한 편은 아니었지만 뭔가 모르게 신뢰가 갔다. 서글서글한 말투로 사람의 마음을 뺏고 자기 잇속이나 챙기려는 사기꾼 기질이 농후한 부동산 중개업자들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월세가 좀 나와도 보증금은 500만 원 정도로 생각하니 최대한 조건이 괜찮은 집으로 안내를 해달라고 했다. 그녀는 딱 3군데 정도 둘러보면 되겠다고 말했는데 하나는 각 실별로 구분등기가 되어 있는 원룸이었고, 하나는 고시원으로 등기가 되어있는데 원룸처럼 임대를 하는 건물의 한 방이었다. 모두 맘에 들지 않았다. 그리고 안내해 준 집이 훗날 우리의 두 번째 신혼집이 될 오피스텔이었다.

그러나 그 집도 현재 살고 있는 집보다 월세는 쌌지만 오래된 건물이었고, 방도 작아 만족스럽지 못했다. 다른 조건은 괜찮았지만 아직 집을 더 알아볼 수 있는 시간이 있었기에 나중에 연락드린다고 하고 마음속에 찜만 해두었다. 그리고 약 2주 정도를 퇴근 이후와 휴일을 이용해 집을 알아봤으나 마땅한 집이 없었다. 우리가 살고 있는 동네의 옆 동네 그리고 옆 옆 동네까지 훑어봤지만 계약할 집은 못 찾고 온갖 종류의 원룸과 동네 구경만 했다.

결국, 처음에 집을 알아볼 때 봐두었던 오피스텔로 계약을 해야 할 것 같았다. 그때 받아두었던 아주머니의 명함을 꺼내 부동산 사무실로 전화를 했다. 다행히 아주머니는 아직 집이 남아 있다고 했고, 나는 주저 없이 계약을 할 거라고 말했다. 아주머니는 집주인과 연락을 해볼 테니 약속을 잡자고 했다. 그리고 두 시간 후 나는 부동산 사무실에서 집주인과 만나 계약서를 작성했다.

집의 도배나 장판 상태는 쓸만해서 그대로 쓸 테니 월세를 만원 깎기로 집주인과 합의하고, 보증금 500만 원에 월세 44만 원 그리고 관리비가 따로 없는 조건으로 2년 계약을 했다. 나는 1년만 계약하고 싶었으나 집주인은 1년 계약은 안 한다고 해서 2년짜리 원룸 월세 계약을 체결했고, 우리의 두 번째 신혼집이자 딸아이의 임신과 출산 그리고 육아의 보금자리가 그렇게 정해지게 되었다.


#
나는 왜 월세라는 선택을 하였을까? 가장 큰 이유는 자유롭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매달 월세를 지불하기는 하지만 큰돈을 전세금이라는 명목으로 묶어두지 않기에 부담이 없었다. 장기 전세와 같은 공공임대주택 입주와 내 집 마련의 시기가 우리가 계약한 집의 만기가 다가올 즈음에 원하는 데로 이루어진다고 보장할 수는 없었다. 움직여야 할 때 언제든지 과감하게 움직일 수 있으려면 보증금을 최대한 적게 걸고, 월세로 사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묶어놓은 돈의 크기가 크면 클수록 그 돈을 계약이 만료되기 전에, 때로는 계약이 만료되더라도 다시 돌려받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었기에 큰돈이 묶임으로써 발생하는 위험과 부담을 감당하고 싶지 않았다.

아울러 가볍고 싶었다. 신혼이지만 풀옵션의 원룸에서 살며 추구했던 미니멀한 삶을 계속해서 이어가고 싶었다. 확실한 우리 집을 잡기 전까지는 가구든 가전이든, 어떤 짐도 늘리고 싶지 않았다. 현재를 사는 데에 반드시 필요한 것이 아니라면 그 무엇도 새롭게 소유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원하는 것을 추구하는 대신 치러야 할 대가가 있었다. 우선은 월세를 부담해야 했다. "돈을 모으려면 전세로 살아야 된다."라는 말을 안 들어본 것은 아니었다. 신혼집을 구하러 다니면서 만난 공인중개사 셋 중 한 명은 나에게 그 말을 했다. 하지만 큰돈이 묶여서 생기는 구속과 감당해야 할 위험과 부담이 싫었던 나는 그 말을 조용히 흘려보냈다. 월세를 부담해도 나는 자유로운 것이 좋았고, 언제든 가볍고 싶었다.

다음으로 불편함을 감수해야 했다. 계약을 한 집이 이전의 집에 비해서 작고, 오래되다 보니 이사 후 짐 정리를 하면서 공간의 부족을 절감했다. 많지 않은 짐이었지만 아내와 나의 옷가지와 이런저런 물건들로 방 안의 수납공간과 여유 공간은 순식간에 차버렸다. 화장실과 현관으로 가기 위해서는 매일 비좁은 통로를 왔다 갔다 해야 했고, 필요한 물건을 새롭게 집에 들여놓으려면 자리 잡을 공간에 대한 고민을 늘 해야만 했다.

언제나 그랬다. 무언가를 선택하면 필연적으로 그 선택에 대한 대가를 지불해야 했다. 내가 선택한 단칸방 신혼집 또한 마찬가지였고, 그 선택에 대해서 나는 책임을 져야만 했다. 대가를 지불하기 싫다고, 책임을 지고 싶지 않다고 선택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내가 삶을 살아가고 있는 이상 어떤 식으로든 선택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선택하지 않으면 삶은 진행되지 않았다. 삶은 선택이었고, 자신의 선택에 의해서 우리의 삶은 결정되는 것이었다. 결국 무엇을 추구하느냐가 중요했다. 인생을 살아가려면 언제고 어떤 식으로든 선택의 과정을 거쳐야 하기에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 그것이 선택의 기준이었다.

나는 법적으로든, 물리적으로든 자유롭고 싶었다. 가벼워야 자유로울 수 있었기에 신혼집을 단칸방에 월세로 얻었다. 지나고 보니 미니멀한 삶, 시크해 보이는 선택의 이면에는 공간 부족으로 허덕이는 처절한 생활이란 대가가 있었지만 원하는 것을 추구했기에 담대하게 선택하고, 겸허하게 주어진 삶의 과정을 견뎌낼 수 있었다.

이전 02화 단칸방이라는 공간의 의미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