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톡", "카톡"
사무실에서 휴대폰을 들여다보는 나의 눈은 긴장되어 있었다. 조산기로 인해 한 달 정도 관리 입원을 했던 아내가 뱃속 딸아이와 함께 집으로 온 지 5일이 지났기 때문이었다. 언제 나올지 모르는 태아를 품고 있는 만삭의 아내가 집에 혼자 있기에 그녀가 보내는 연락마다 나의 신경은 온통 곤두서 있었다.
퇴원할 때 병원에서는 이제 언제든 아기가 태어나도 괜찮다고 했다. 37주를 넘긴 정산기(正産期)에 아이를 출산하기 위해 이를 악물고 버텼던 한 달이었는데... 병원에서 머무는 내내 링거주사를 맞으며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고 하루 종일 누워서 있어야 했던 아내는 정산기에 들어서고서는 집에 몹시 오고 싶어 했다. 그냥 며칠 더 병원에서 있다가 출산해도 될 텐데 아내는 그 며칠이라도 단칸방 우리 집에 있고 싶어 했다.
"카톡", "카톡" ~
연신 카톡이 울려댄다. 아내로부터의 연락이다. 양수가 터진 것 같다고... 준비해서 병원에 가겠다는 문자가 왔다. 문자를 본 순간, 나의 가슴은 쿵쾅쿵쾅 심장소리로 요동을 치는데 아내가 보내는 문자의 어조는 무척이나 차분했다. 출산을 대비해 미리 챙겨둔 짐가방에 자신의 노트북까지 챙겨서 택시를 타고 병원에 간 아내는 양수가 터진 상황에서도 전혀 긴장한 것 같지 않았다. 내가 출근을 해야 했기에 아내 혼자서 병원으로 가야 하는 상황을 많이 우려했던 나의 걱정이 기우였음을 증명하듯, 아내는 당당히 두발로 걸어서 누구의 도움도 안 받고 무사히 병원에 도착했다.
나는 부랴부랴 회사에 반차를 내고 병원으로 향했다. 병원에 도착하니 아내는 자신의 입원실을 배정받은 후, 산모복을 입은 채로 침대에 누워있었다. 아직 본격적인 진통이 시작되지 않아서 그런지 얼굴은 괜찮아 보였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 내가 병원에 온 이후 아내의 진통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결혼하고 같이 살며 아내가 그렇게 아파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는데... 너무나 고통스러워하는 아내의 모습이 무척이나 낯설고 애처로웠다.
몸을 이리저리 비틀며, 고통스러워하던 아내가 분만실로 들어갔다. 나도 온통 초록색인 분만복을 간호사에게서 건네받았다. 분만실 밖에서 분만복을 입으려는데 아내의 비명소리가 문틈으로 새어 나왔다. 그냥 수술해달라는 말을 몇 번이고 하는 것 같았다. 자연분만에 대한 의지가 강했던 아내가 그렇게 말할 정도이니 아내가 느끼고 있을 고통이 어느 정도일지 짐작이 갔다.
분만실에 들어갔다고 해서 금방 아이가 세상 밖으로 나오는 것이 아니었다. 진통의 과정은 계속되었다. 나는 밖에서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다. 차라리 아내의 옆에서 손이라도 잡아주고 있으면 괜찮을 것 같은데 분만실 밖에서 소리로만 상황을 짐작하려니 심적으로 많이 힘들었다.
그러나 잠깐씩 아내와 조우하는 상황이 되어도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정말 손을 잡아주며 괜찮다고 말해주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아내는 한없이 고통스러워하는데 남편인 나는 그 고통을 같이 느끼며 덜어줄 수도 없고, 어떤 조치라도 취하며 고통이 없어지도록 할 수도 없었다. 너무나 미안했다. 그리고 미안해서 눈물이 나왔다. 아내는 고통스러워서 우는데 나는 미안해서 울었다.
분만의 과정은 난산이었다. 3.64kg의 딸이 아내의 좁은 질을 통과해서 나오는 것이 힘겨웠다. 간호사들이 아내의 위에 올라가서 배를 온 힘을 다해서 누르고, 별짓을 다하는 것 같았다. 지금껏 힘겹게 견뎌온 만큼 끝까지 자연분만으로 출산을 해내기 위해 아내를 포함한 출산에 참여하는 인원들 모두가 혼신의 힘을 다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얼마의 시간이 지나자 간호사가 태어난 딸을 안고 나왔다. 딸의 얼굴은 새파랗게 멍들어 있었다. 분만 과정에서 질 통로에 얼굴이 낀 채로 얼마간 있어서 그렇다고 했다. 그리고 아이가 태어나면 울음소리가 우렁차게 들릴 거라 생각했는데 우리 딸은 울음소리가 시원스럽지 않았다. 세상 밖으로 나오는 과정이 워낙 힘들었기에 그런 것 같았다. 다행히 간호사는 아이가 건강하다고 했다. 하지만 맥박이 빠르니 상태를 지켜보기 위해 인큐베이터에 잠깐 있을 거라고 하였다.
너무나 힘겨웠던 출산이었기에 나는 탯줄을 자르지 못했다. 난산 이후의 상황에 대한 조치들이 필요했기 때문인지 병원은 내가 탯줄을 자를 수 있는 기회를 주지 않았다. 그러나 아쉬움을 느낄 겨를은 없었다. 딸아이와 아내의 상태가 괜찮은지 살피느라 바빴기 때문이었다. 아내는 회음부 봉합과 같은 출산 이후의 후속 조치들을 받고 있었고, 딸아이는 인큐베이터 안에 들어가 있었다. 아직도 나는 더 가까이에서 아내를 볼 수도, 딸아이를 만져볼 수도 없었다. 그 잠깐의 시간이 왜 이렇게 길게 느껴지던지 1분이 1시간 같았다.
얼마 후 맞이한 아내, 눈물과 땀으로 범벅이 된 그녀는 지그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세상을 다 겪은 듯한 그 눈빛에 나는 조용히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아내의 이마를 쓰다듬으며 고생했다고 말했다. 고맙고, 대견하고... 나는 그렇게 경의를 표할 수밖에 없었다.
아내는 다시 입원실로 옮겨졌다. 간호사는 이곳에서 2일 정도 회복 기간을 가지고 조리원으로 옮길 거라고 했다. 그리고 태어난 딸내미는 언제 보나 싶은 순간, 하얀 속싸개에 싸인 딸아이가 아내의 품에 안겨졌다. 얼굴은 퉁퉁 부어 있었고, 볼과 코 등 아이의 얼굴에서 조금이라도 튀어나온 부분의 거의 모두는 파랗게 멍들어 있었다. 세상으로 나오기가 얼마나 힘들었을까! 딸아이의 얼굴이 힘겨웠던 그 모든 과정을 설명했다.
다행히 아내와 딸아이는 건강했다. 둘 다 힘든 출산의 과정을 견뎌내느라 지쳤을 뿐, 모두 정상이었다. 그리고 긴장이 풀리던 그때, 나는 또다시 눈물을 흘렸다. 출산의 과정에서 남편으로서, 아빠로서 아무것도 해준 게 없는데 둘 다 괜찮아서 감사했고, 두 여자의 목숨을 건 투쟁에 아무런 역할을 못해줘서 미안했다. 가만히 앉아 있는데 그냥 눈물이 흘렀다. 딸아이가 태어난 그 기쁜 날에 나는 그렇게 울보가 되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