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와 딸은 조리원으로 옮겨졌다. 산부인과와 산후조리원이 한 건물에 있었기에 힘들이지 않고 움직일 수 있었다. 아내가 입원실에 있을 때 예약해두었던 방으로 변동 없이 입실했다. 안내 데스크에서 제법 떨어져 있어서 외부의 소음에 영향을 거의 받지 않는 곳이었고, 방의 구조가 잘 빠져서 아내뿐만 아니라 보호자인 나도 생활하기에 불편하지 않을 것 같았다. 이제 이곳에서 2주간 생활하다 집으로 돌아가면 되었다.
회사에는 자녀 출산휴가를 내고, 나도 조리원에서 아내와 함께 생활을 했다. 단칸방 우리 집을 도보로 10분 정도에 왔다 갔다 할 수 있었지만 나는 아내 그리고 딸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함께 있으며 보호자로서 내가 할 수 있는 돌봄을 다해주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조리원 생활에 어느 정도 적응이 될 때쯤 딸아이의 출생신고를 위해 주민센터에 방문했다. 이미 사전의 조사를 통해 대략적인 진행 절차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 실제로 출생신고를 하면서는 고민의 시간이 주어질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는데 딸아이의 등록기준지를 적어야 하는 순간, 나는 한참 동안이나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딸아이의 등록기준지는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하나는 부모의 등록기준지 중 하나였고, 다른 하나는 현재의 주소지였다. 그러나 아내가 일본인이었기에 딸아이는 아빠인 나의 등록기준지만 선택할 수 있었다. 군산이라는 지방 소도시에서 태어난 나는 아버지께서 젊은 시절, 중동 파견 근로자로 일하고 고국으로 돌아와 고향땅에 산 단독주택을 등록기준지로 하고 있었다. 호적제가 시행되던 시절에 가족 전체가 본적을 둔 집이었지만 삶이란 흐름과 함께 이런저런 사연을 가족들의 가슴에 남기고 팔게 된 지금은 남의 집이 된 곳이었다.
그 집을 딸아이의 등록기준지로 해야 하는가! 나도 많이 어렸을 때라 기억할 수는 없지만 집안의 사연을 담고, 지금은 남의 집이 된 그곳을 굳이 딸아이가 평생 안고 갈 서류의 한 부분을 차지하도록 할 필요가 있는가! 그럴 필요는 없었다. 나는 딸에게 부모의 고향이 아닌 딸 자신의 고향을 주고 싶었고, 집안의 역사에 딸의 역사가 편입되는 것이 아닌 딸만의 역사를 새로운 등록기준지에서 만들어가길 바랬다.
그러나 현재의 주소지를 딸아이의 등록기준지로 하는 것도 고민이 되었다. 나의 등록기준지가 아니면 선택의 여지없이 딸은 우리의 단칸방이 있는 건물의 주소가 등록기준지가 되어야 하지만 임대로 살고 있는 단칸방 건물을 딸의 그것으로 한다는 것이 탐탁지 않았다. 조금만 더 지나면 내 소유의 우리 집을 마련할 것인데 딸의 서류에 지금의 단칸방 흔적을 남겨야만 하는가! 혹시라도 다른 방법은 없는가! 다른 방법은 없었다. 나의 등록기준지가 아니면 딸은 단칸방이 있는 건물의 주소를 등록기준지로 해야만 했다.
나는 서울이 딸아이의 바탕이 되길 바랬다. 전국 각지의 사람들이 꿈과 희망을 품고 몰려드는 도시가 딸의 고향이 되길 바랬다. 서울에 근거가 없는 타지의 사람이 서울에서 생활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누구보다도 잘 알기에 나는 딸의 홈그라운드를 서울로 만들어주고 싶었다. 생각이 깊어져도, 생각이 길어져도 결론은 서울이었다. 비록 현재의 단칸방이 딸의 등록기준지가 된다 하더라도 어쩔 수 없었다. 그곳이 딸아이가 잉태된 곳이며, 딸이 생의 초창기를 보낼 환경이었다.
딸아이의 출생신고서에 우리의 단칸방을 등록기준지로 적으며 의지가 불타올랐다. 정말로 잘 살겠다고... 단칸방에서 딸을 키우는 세월 동안 그 삶이 훗날 좋은 기억으로 추억될 수 있도록 살아내겠다고... 딸아이가 커서 함께 우리의 단칸방을 다시 찾았을 때, 웃으며 그 시절의 에피소드들을 이야기해 줄 수 있게 살겠다고 나는 다짐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