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초등학교 때부터 소설이 좋았다.
부모님 맞벌이에 집 안은 늘 비어 있었고, 어린 나이에 일기장은 늘 염세적인 이야기로 가득했다.
친구들도 원치 않는 '자따'였고, 혼자만의 시간이 불편하지 않았다. 오히려 좋았다.
매일 동네에 작은 '새마을문고'라는 책방에서 다양한 책들을 빌려 읽었다. 닥치는 대로 하루에도 몇 권씩의 소설책을 밤새 읽어 내려가곤 했다. 나는 책 속의 세상에서 매일을 살았다.
중학교 때부터는 끄적끄적 소설을 써보게 되었다.
천리안 나우누리 시절, 파란 바탕화면의 거대한 모니터에 하얀 글씨를 새기는 것이 나의 가장 큰 행복이었다.
여전히 나의 세상은 분명했고 파괴되지도, 불행하지도 않았다.
그렇게 대학 때까지 나의 삶은 글을 쓰는 시간과 글을 쓰지 않는 시간으로 나뉠 뿐이었다.
버스로 왕복 3시간 거리의 창호회사를 다니기 시작하면서, 나는 나의 글들이 '돈'이 되지 못하면 쓸모가 없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사람들과 어울려 '대우를 해 드려야 하는' 입장에 나는 자유를 잃었다. 비관적이 되어 갔다. 그리고 소설 밖의 세상에 타협 아닌 타협을 배우며 나의 가능성을 응축시켰다.
나는 무능했고, 얇은 유리를 밟듯 아슬아슬한 세상이 두려웠다. 그렇게 글 속의 세상과 서서히 안녕을 고했다.
결혼을 했고, 아이들을 낳았다. 나름의 고착화되어가는 나의 삶은 그다지 불행하지도 않았고, 불만족스럽지도 않았던 것 같다.
어느새 '글'이란 단어는 이력서에 '취미'로만 남았고, 그저 잠잘 때 꾸는 꿈처럼 몽롱하고 손에 잡히지 않는 것이 되었다.
삶은 내게 조금 척박했다.
남들이 보기에는 나름 괜찮은 삶이었고, 나쁘지 않은 가정을 꾸렸고 큰 문제가 보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내게는 항상 버리지 못한 '미련'이 나의 한 켠을 외롭게 했다.
세상은 이미 파란 바탕이 아니었다. 많은 이야기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고, 나는 만들어내는 사람이 아닌 구경하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다른 이들의 글을 보며, 나는 마음이 아팠다.
도달하지 못한 내 능력을 편안하게 받아들이기에 '글쓰기'를 너무 사랑했다. 아직도 버리지 못한 마음이 있었다.
항상 글을 쓰지 못하는 핑계는 존재했다.
출근과 퇴근을 포함해 거의 하루를 다 소비하고 나면, 집에는 아이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만성피로와 함께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해봤자 '남이 읽어주는 글'을 쓰지는 못하리라 여기게 되었다.
그렇게 나는 '포기'하는 편한 방법을 택했다.
다시 글을 쓰고자 하는 계기는 우습게도 버릴 수 없다고 여겼던 것들을 정리하려 마음먹었을 때였다.
남들이 보는 삶이 아닌, 내가 살고 싶은 삶은 살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중에 하나는 내 글을 다시 써보는 것이었다.
이제와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시작하고 싶었다.
핑계는 더 이상 내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하루의 시간을 조각내어 내가 해야 할 일을 해내며 어떻게든, 내가 원하는 삶을 이루어보기로 단단히 마음을 먹었다.
그렇게 브런치를 찾았다.
글을 쓰는 시간은 내게 '소중함'을 주었다.
다른 소중한 것들도 분명 있었지만, 그 소중함은 뭐랄까. 정제되지 않은 순수한 나의 깊은 곳에서 나오는 그런 것이었다.
누구에게도 공유되지 않는 나만의 것. 그런 느낌이었다.
무엇보다 내 글을 읽어주는 이들이 있다는 '행복감'이 있었다.
중학교 때부터 나를 달리게 했던 그 열정과 다시 조우하게 되고, 글을 쓸 수 있는 밤이 기다려지기 시작했다.
피곤함에 믹스커피를 두 봉이나 넣고 마셨지만, 나는 괜찮았다. 그저 '할 수 있어' 좋았다.
혹시, 지금 '네가 무슨 글을 쓰냐'라던가, '시간이 남아도냐'라는 말을 하는 사람이 곁에 있다면 과감히 버려라.
나는 이제 안다.
누가 뭐래도 '글을 쓰는 것'이 나에게 '위로'가 되어 준다는 것을. 나를 살게 한다는 것을.
잘 쓰든 못 쓰든 관계없다.
돈이 되든 안 되든 관계없다.
물론 그 즐거움이 나의 삶을 윤택하게 할 수도 있다면 더없이 좋겠지만, 다만. 다만 말이다. 그게 좋은 거다.
그저 좋은 게 있다면, 그것을 해야만 하는 것이다.
나는 이 밤도 벅찬 가슴으로 자판을 두드린다.
'글 쓰기'를 하는 나는 다른 어떤 시련들도 헤쳐 나갈 수 있을 것 같은 '희망'을 주입시켜 준다.
지금 새벽에 글을 쓰는 나는, 오늘의 나를 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