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펙트럼의 끝을 말하고 싶어
불호를 존중받는 것은 우정이고 불호를 이해받는 것은 사랑이다. 불호를 말하는 것은 용기이고 불호를 들어주는 것은 포용력이다. 불호를 공유하는 것은 우정의 시작이고 타인의 불호가 나의 삶의 양식 중 하나가 되는 것은 굳건한 사랑의 징표이다.
불호에 스펙트럼이 있다면 친구가 되고 싶은 사람에게 가장 약한 불호부터 말하기 시작한다. ‘나는 이것을 싫어한다’라고 말하면서 이 사람이 나와 친구가 될 수 있는 사람인지 가벼운 테스트를 한다. 친구의 반응을 살핀다. ’오, 나도 그것 싫어해. ‘라는 대답을 듣는 순간 ’이 사람과는 친구가 될 수 있겠구나. ‘라는 작은 확신을 한다. 저것도, 그것도 싫어한다고 말하는데, 저것도, 그것도 싫어한다면 분명 소울메이트를 찾은 것이다.
이것을 싫어해에서 한 단계 나아간 테스트는 ‘이 사람을 싫어한다’이다. 어떤 사람을 싫어하는지 누군가에게 말할 수 있다는 것은 더 고차원적인 테스트이다. 같이 아는 사람이라면 내 불호를 말함으로써 듣는 사람과, 대상이 되는 사람, 둘 다를 한꺼번에 잃을 수도 있는 리스크를 져야 한다.
불호의 동지를 얻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내가 왜 이 사람의 어떤 면이 싫은지를 누군가에게 털어놓을 수 있다는 것은 나름의 신뢰를 바탕에 둔 일이다. 그래서인지 누군가가 나에게 어떤 사람에 대한 불호를 털어놓는 것에 꽤나 안도를 느끼기도 한다. 나와 친밀해지기 위한 두 번째 테스트를 하는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알랭 드 보통의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에 이런 부분이 있다.
우리는 둘이 있을 때 다른 사람들의 험담을 하면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 클로이는 친구나 동료에 대한 나의 판단의 최종 저장소가 되었다. 내가 그들에게 느꼈지만 부정하려고 했던 것들을 나에게 공감하고, 심지어 부추기기까지 하는 청중에게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었다. 우리는 종종 뒷공론에 탐닉했다. 함께 좋아하는 것을 발견하는 기쁨이 얼마나 큰지 몰라도, 함께 싫어하는 것을 욕하는 친밀함에 비길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가끔 우리는 우리가 지금까지 만난 모든 사람에게 심각한 결함이 있으며, 사실 우리가 지구에 남은 단 두 명의 품위 있는 인간들이라는 결론을 내릴 지경에 이르렀다 [수줍음 때문에 대놓고 그렇게 인정하지는 못했지만]. 사랑은 외부자들을 지속적으로 비판하면서 커나간다. 우리가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충성을 지키지 않는다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서로에게 충성한다는 가장 훌륭한 증거였다.
- 알랭 드 보통, <친밀성>,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사랑뿐 아니라 우정 역시 불호와 뒷공론을 공유함으로써 커나간다. 그런데 사랑하는 사람에게 친구에게 보다 타인에 대한 뒷공론을 마음 놓고 할 수 있는 이유는 연인이라는 특별한 지위가 부여한 우정보다 조금 끈끈해 보이는 유대의 거미줄을 믿기 때문이다.
불호의 스펙트럼에서 오른쪽 끝에 자리하는 것을 나누고 싶다. 왼쪽이 약불호고 오른쪽 끝이 강불호라면 강불호에 자리하는 그것을 말하고 싶다. 아주 강력하게 그것을 말하고 싶고 이해받고 싶다. 불호에 끝에 있는 것은 불호라고 말하기에는 너무 깊고 어둡고 아파서 잘 덮어두고 오히려 무관심한 것처럼 지낸다.
나의 코어에 자리하는 것인데 만약 말을 하려거든 꼭 끝에 ’그런데 이제는 상관없어. ‘라는 말을 붙일 것만 같다. 나를 구성하고 움직이는 가장 상관있는 지점인데 상관이 없다고 말할 것이다. 상관이 있다고 말하는 순간 내 존재가치에 특별함을 부여하는 뭔가가 없다고 말해버리는 것 같으니까. 레몬 파운드케이크에 레몬 아이싱이 없고, 소금빵의 표면에 있는 굵은소금이 없어지는 것 같으니까.
그 스펙트럼의 끝 지점은 사랑하는 사람에게도 쉽게 말하기 어려운 지점이다. 그 지점을 말하면 관계가 끝날 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자극한다. 그런 지점을 어떤 사람들은 하나씩 마음에 품고 살아간다. 결핍은 결핍을 아주 강하게 끌어당긴다. 내가 마음을 놓을 수 있었던 사람들 역시 불호의 극단, 싫어함을 넘어선 공포와 불안, 깊은 구덩이, 절대 건드리면 안 되는 그런 지점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었다.
이 지점을 어떠한 계기로 누군가와 나누게 되는 순간 그 사람과의 관계 자체에 애착이 생겨버린다. 나의 이런 면까지 알았다면 맞지 않는 사람이더라도 뭔가 맞아야 할 것만 같아져 버린다. 그래서인지 비밀 아닌 비밀을 말해버렸다면 우정이라는 이름의 줄보다 더 끈끈한 거미줄로 묶어버리려고 했던 것도 같다. 하지만 웬만한 계기가 아닌 이상에야 나를 옭아매는 줄을 직접 만들지 않는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그런 지점 같은 건 없는 사람처럼 해맑고 별생각 없이 이런저런 행동을 하는 철부지 아이 같은 모습만을 보여준다.
지난 연애 히스토리까지 반은 재미 삼아 글로 남기는 에세이 작가라도 실제의 나는 심리적으로 타인에게 나의 일부를 주며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다. 공감이라든지, 사랑이라든지 하는 새로 생겨난 감정을 나눠주기도 하지만 내가 가진 나의 코어 감정을 사람들에게 나눠주지 않는다.
그런데 아주 가끔씩, 아주 드물게, 아주 한정적인 사람에게 내 코어를 드러낸다. 마지막으로 코어를 드러낸 적이 언젠가 하니 벌써 몇 달 전이다. 징징거린다는 표현을 얼마 전에 들었는데, 내가 징징거린다는 것이 아니라 다른 친구들끼리 자주 서로 징징거린다는 이야기. 나는 무려 4개월 반 정도의 기간 동안 징징거린 적이 한 번도 없다. 내 속얘기를 한 적이 없다.
글을 쓰긴 하지만, 기승전결로 어떤 일이 있어서 슬프다, 속상하다, 감정이 어떻다고 몇 달간 입밖에 꺼내 본 적이 없다. 모든 감정은 내 안에서 이미 다 1차적으로 해결을 했고 아주 정돈된 형태로만 타인에게 이야기를 했다. 이해가 안 되는 일과 이해가 안 되는 감정은 이해가 될 때까지 시간을 두고 기다렸다. 이렇게 하는 것이 성숙한 방법이라는 것은 알고 앞으로도 이렇게 할 것이다.
그런데 그 징징거린다는 말을 들으니, 나도 조금 징징거리고 싶어졌다. 불호에 대해 강하게 말하고 싶어졌다. 시원하게 누군가에 대한 이야기를 쏟아내고 싶어졌다.
한동안 마음으로만 간직해야겠지만, 불호의 끝을 말할 수 있고 이해받아야 조금은 덜 외롭다고 느껴질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