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눈치가 엄청나게 빠르다. 대화를 나누던 중 무심결에 한 말에 그는 송곳같이 날카롭게 내 언어의 함의를 찔렀다. 전날밤 잠을 제대로 못 자서 피곤하고 예민하던 중에 속마음이 도저히 그것을 온전히 담을 수는 없는 언어라는 매개로 튀어나와 서로를 아프게 하고 다치게 했다.
감정이 정점을 찍고 소강하던 중 문득 내일 죽으면 어떨 것 같냐고, 돌아가고 싶은 때가 있냐는 얘기가 나왔다. 나는 하루하루 후회 없이 살아서 단 하루 전으로도 돌아가고 싶지 않고 그냥 담담히 죽을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어쩌면 굉장히 단단하고 다부진 사람처럼 들리는 이 말 이면에 내가 늘 가졌던 속마음은 내 인생 혼자 씩씩하고 꿋꿋하게 책임져 보겠다고 너무 힘들고 피곤하게 살았는데 이걸 다시 또 겪고 싶지는 않다는 마음이었다. 무엇보다 사람을 겪어야 했던 일만큼은 시간을 돌려 한 번 더 겪고 싶지는 않았다.
그는 죽기 전 시간을 돌릴 수 있다면 나를 처음 만났던 날로 돌아가고 싶다고 했다. 아무것도 바꾸지 않고 처음 나를 알게 된 날부터 지금까지 우리가 나눈 모든 것을 온전히 그대로 다시 살아내고 싶다고 했다.
그 말을 듣자마자 눈물이 펑펑 났다. 눈물이 나면 콧물이 눈물보다 더 많이 나오는데 그 자리에서 눈물콧물을 왕창 쏟아냈다.
그 말을 듣자마자 나도 그렇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을 돌릴 수 있다면 그와 나 사이에 아무것도 바꾸고 싶지 않다.
모든 날이 다 좋았다.
그가 나를 사랑하는 눈빛으로 봐주었던 순간, 내가 잘 때도 그는 자는 대신 밤새 나를 지켜보기를 택했던 날도 특별했지만, 그가 과연 나를 만족시켜 줄 수 있는 사람일까 기대 반 의심 반 마음 졸였던 날이나, 혹시 내 첫 생각이 틀렸으면 어떡하지, 그는 그냥 평범하게 성격의 모난 점들을 가진 한 사람일 뿐이고 난 그 부분을 견디지 못해 결국 이 관계도 실패하면 어떡하지 하는 부정적인 생각에 사로잡혔던 순간마저 아무것도 바꾸지 않고 온전히 모든 날들을 다시 살고 싶었다.
그를 알게 되고 나서 단 하루도 아름답지 않고 특별하지 않고 빛나지 않은 날은 없었다. 불안에 사로잡힐 때나 서로를 송곳처럼 찌르던 날에도 우리는 서로를 온전히 끌어안았다. 서로를 감싸 안아주고 각자의 부족한 점을 채워나가려 애쓰며 더 많이 사랑하기로 마음먹었고 행동으로 옮겼다. 늘 사랑하려고 마음먹었던 것보다 더 많이 사랑했다.
왜 그렇게 우냐는 말에 이거는 좋은 눈물이라고 했다. 오빠는 나를 이렇게 사랑하는데 나는 사랑을 몰라서 이렇게 우는 것이라고 했다. 나도 오빠를 있는 그대로 완전히 사랑하는데 우리 관계에서 내 만족감을 완벽하게 채우고 싶은 욕심을 부렸던 게 사랑을 너무 모르는 것 같아서 그렇다고 했다.
남자친구가 나를 어떤 마음으로 사랑하는지 그 말 하나로 너무나도 느껴졌다.
나는 지나고 나서 그렇게 후회했던 적이 있다. 그런데 옆에 있으면 내가 가진 것의 소중함을 잊고 그때 그 마음은 온데간데 잊은 채 불만족하고 불만을 토로하기 바빴다. 그런 내가 겹쳐 보여 뉘우침의 눈물을 쏟았다.
다음 날 아침에도 나는 원래 어제 쉬려고 했는데 못 쉬었다며 이제 화, 수, 목, 금 매일 할 일이 있어서 못 쉰다며 짜증과 투정을 잔뜩 부렸지만, 이내 그날도 가장 특별하고 아름다운 날이 되었다.
그가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바라보면 내가 얼마나 부족한 사람인지 느껴진다. 오빤 나를 사랑하는데 나는 너무 부족한 사람인 것 같다는 내게 자기가 더 넓은 마음을 가지기 위해 노력하고 나를 더 많이 사랑하고 표현할 것이라고 했다. 이 이야기를 들으니 삶이 내게 과분한 사랑을 주는구나 싶었다.
그래서 내일 죽어도 괜찮을 만큼, 그리고 돌아간다고 해도 온전히 다시 겪어낼 수 있을 만큼 이래도 저래도 다 괜찮은 삶이구나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