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격하고 욕심 많은 나는 사랑받는 것만으로 부족한가 보다
처음 만난 날 좋아하는 눈빛을 보았고, 얼마 지나자 빤히 보며 눈을 못 떼는 사랑에 빠진 눈빛을 보았다. 그리고 이제는 빤히 보는 눈빛이 더욱 부드러워져 진짜 나를 깊이 사랑하는 눈빛이 되었다.
그에게 3단계 사랑에 빠진 것 같다고 했다. 원래부터 내가 사랑을 1, 2, 3단계로 분류했던 것은 아니지만 그의 눈빛의 깊이가 확연히 달라져 분명한 층위로 구분할 수 있었다. 이런 사랑은 한 번도 받아본 적 없는 것 같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왠지 자존심이 상하게 느껴져 그 자리에서 말하지 않았다.
왜 3단계가 됐냐고 물어봤다. 굳이 한 순간을 꼽자면 새벽에 같이 산책을 갔다가 24시간 무인 매점 겸 문방구에 갔는데, 손바닥에 꼭 들어오는 고양이모양 스퀴시 인형을 마음에 들어 해서 사줬더니 그걸 만지작 거리면서 걸어오는 것을 보고 딸을 보면 이런 느낌일까 묘한 감정이 들어 그렇게 된 것 같다고 했다.
스펀지 같은 질감인데 너무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손 안에서 쓰윽 줄었다가 다시 부풀어 오르는 그 촉감을 좋아하기도 하지만, 고개를 살짝 삐딱하게 갸우뚱하고 동그란 눈과 작은 입을 뽐내는 고양이의 얼굴이 그를 닮아 마음이 갔다. 면도한 다음날이면 눈 밑 볼까지 두꺼운 털이 자라나기 시작하는데 볼에도 두꺼운 수염이 나려고 하는 게 마치 고양이 같았다.
그리고 싸우거나, 아니 내가 일방적으로 불만을 표현한 날이나 그다음 날이면 절대 자기를 버리지 말고 더욱더 사랑해 달라는 아기고양이 같은 눈빛이 되어있었다. 그런 눈빛을 보면 사랑해 줄 수밖에 없었다.
처음부터 좋았고 편안했지만, 아기고양이 같은 눈빛을 보면 혹여나 마음에 불안함이 생길 때도 절대 떠날 수는 없겠다 싶었다.
아이처럼 함께 놀고 어머니처럼 사랑해 주다가 요즘 난 아버지의 사랑처럼 엄격해지기 시작했다. 내가 그에게 심리적으로 조금 기대는 것은 괜찮아도 그가 내게 조금이라도 기대려는 것은 싫어졌다.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문득 그가 “나는 네가 하자는 대로 할게. 결혼할 때 몸만 갈게. ”라고 한다거나 내가 무엇인가를 알아봐서 결정하면 따른다는 식으로 말하는 것이 반장난이더라도 거슬리기 시작했다.
나는 주도적인 성향이라, 리드하고 의사결정하는 것을 좋아하고, 자기주장과 고집이 강한 사람보다는 나를 믿고 따르는 사람이 잘 맞는 것은 확실하다.
남자친구 역시 자기 고집과 기준이 확고한 사람이고 그냥 어느 부분에서 나를 믿고 따른다는 것이지만, 조금이라도 책임감 없는 듯한 뉘앙스의 말을 하면 그게 싫었다. 진취적이지 않고 자기 인생에 완전한 책임감을 가지고 스스로의 인생을 개척해 나가려는 태도가 아닌 사람을 보면 그냥 너무 답답했다.
그런데, 내 남자친구가 만약 그런 모습을 보인다면 너무 힘이 빠질 것 같았다. 나는 확고한 목표를 가지고 전략적으로 하루하루를 사는데, 만약 누군가 내게 숟가락 얹으려고 한다면 심리적으로 더 힘들 것 같았다.
물론 그 역시 그의 가치관에 따라 성실하게 일하며 책임감 있게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우리 관계에도 처음부터 지금까지 적극적이고 진취적이었다.
욕심 없이 살기를 선택했다는 그는 나를 아무 복잡함이나 재는 것 없이 아주 단순하고 순수하게 사랑한다는데, 그리고 그런 그가 너무나도 좋았는데 왠지 모르게 욕심을 부리게 되는 나를 마주한다.
남자한테 특별하게 바라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그저 그의 인생에서 1인분의 몫을 성실히 수행하며 살아가 주기를, 그리고 내게 어른처럼 흔들리지 않고 단단한 사랑을 주기를 기대하는데 조금이라도 비관적이거나 자존감 낮아 보이는 말을 하면 이제는 엄격한 아버지 같은 모습이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자기가 부족한 사람이라는 뉘앙스의 말을 하면, 왜 그러는 거냐며 모성애를 자극하고 싶은 거냐며 나무라기 시작했다. 매번 용기를 북돋워 주는 역할을 하게 되는 것도 힘들 것 같다고 했다.
나를 위해서 자존감 높고 단단한 사람이 되어주라고, 기댈 수 있는 듬직한 어른같은 모습이 되어 달라고 했다.
나를 너무나 사랑해서 그전의 그와는 다르게 내게 시간과 애정을 쏟아붓는 그에게, 그냥 그의 삶을 열심히 사는 모습을 보고 싶다고 했다. 미리 보기로 약속하지 않은 날에는 퇴근하고 운동하고 자기계발하거나 미래를 위해 준비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물론 그래도 우리는 자주 보고 서로를 우선순위에 둘 것이다. 내가 원하던 연애를 하고 있다. 그저 욕심 많은 나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스스로를 더 사랑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 나랑 똑같이 열심히 사는 사람을 보며 힘을 얻고 싶다. 연인이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스스로와 한 약속을 지키는 모습을 보며 더 매력을 느끼고 싶다.
매력적인 상대에게 엄마 같은 사랑을 주고 싶다. 그리고 난 완전히 믿고 기댈 수 있는 어른스러운 사랑을 받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