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빠라는 이름에 걸었던 기대
모임언니한테 남자친구랑 싸우느라 잠을 못 자서 피곤하다고 했다. 안 그래도 피곤해 보인다고 했다.
내게 잘 지내냐는 말에 싸우긴 싸우는데 잘 지낸다고 했다. 원래 연애하면 싸우냐고 묻길래 나는 원래 자주 싸운다고 했다. 뭐 때문에 싸우냐고 하길래, 그냥 사소한 것들인데 둘 다 소심하고 마음에 있는 얘기는 다 해야 해서 그렇다고 했다.
예를 들면, 사소한 걸로 화나서 뭐라고 하면 그냥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면 풀릴 일인데, 자기 입장과 마음 얘기를 길게 늘어놔서 싸운다고 했다. 둘 중 한 명이 감정 표출하면 기분 나빠져서 더 심한 말로 응수하거나, 하고 싶은 말 꾹 참으며 져주지 않고 자기 마음도 다 털어놓아야 직성이 풀려서 그렇다고 했다.
처음 만날 날 이 사람은 보석 같다고 느껴서, OO오빠(보석이모티콘)으로 저장해 놨었는데 연락처에 저장된 이름을 OO(보석이모티콘)(파란색하트)로 바꿨다.
나이 차이도 꽤 나고, 오빠처럼 져주고 품어주고 이해해 주기를 바랐는데 그냥 친구 같아서 오빠라는 글자는 지워버렸다.
화나서 그런 것은 아니다. 오히려 오빠라는 글자에 거는 기대 없이 이 사람이 원하는 방식대로 더 품어주고 사랑해 줘야겠다는 마음으로 저장명을 바꿨다. 어차피 연인이면 나이 차이에 상관없이 동등하게 만나는 것이고, 이 사람도 나를 전혀 어리게 대하지 않고 대등하게 대하는데 이름 옆에 오빠라는 글자는 불필요해 보였다.
원래 가족, 친척, 회사사람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은 이름만으로 저장한다. OO오빠라고 굳이 저장한 것은 내 희망, 소망, 결핍, 어쩌면 이기적인 욕심을 담은 철저하게 내 행복을 우선시한 의도적인 선택이었다.
몇 차례 이야기를 했었다. 기댈 수 있는 든든한 남자친구가 되어줬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는 그때마다 선뜻 노력하겠다고 했다.
휴대전화 저장명을 바꿨다는 사실과 바꾼 이유를 말해줬다. 감정표현 잘하고 속마음 얘기도 잘하고 누구보다 대화가 잘 통하는 점이 좋다고 했다. 오빠처럼 덜 느껴지더라도 이런 장점을 더 높이 산다고 했다. 내가 이해받고 싶은 만큼 오빠도 이해받고 싶고, 힘들 때 내가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은 만큼 오빠도 내게 기대고 싶은 마음을 이해하기로 해서 더 품어주려고 오빠라는 글자를 지웠다고 했다.
오늘도 그는 문득 내게 먼저 내가 오빠라고 느낄 수 있게 노력하겠다고 했다. 나는 있는 그대로의 그를 사랑한다며 지금처럼 서로 아껴주고 이야기 잘 들어주면 그걸로 됐다고 했다.
그는 그래도 자기가 다른 어떤 사람이 될 수 있는지도 보여주고 싶다고 했다. 알겠다고 했다.
어젯밤에 전화를 끊으며 사랑한다는 그에게 나 역시 사랑한다고 했는데, 내게 그 말을 하는 목소리가 개미 목소리 같다고 했다.
진심이고 부끄러워서 그런 거라고 했지만, 그는 전에는 자신감 있게 잘 말했는데 분명 뭔가가 있어서 그런 것이라고 했다. 난 아니라고 했지만 그는 그건 나중에 가봐야 알 수 있는 것이라고 했다.
뭐, 마음에 걸리는 게 있냐고 묻길래, 없다고 했다. 평생 지지고 볶고 싸우기로 한 이후로 마음이 너무 편해지고 안정됐다고 했다.
새벽 5시까지 몸은 옆에 있는데, 마음은 잠시 멀어진 상태로 무거운 분위기 속에 뒤척이다가 언제나처럼 나는 힘들다며 속마음을 말했고, 그는 우리 관계에 대한 내 고민을 더 큰 사랑과 의지로 잠재워주었다.
나는 그에게 이렇게 평생 지지고 볶고 싸우자고 했다. 그는 그 말을 듣고 키스해 줬다. 왜 대답을 안 하냐고 하니까, 동의한다는 뜻이라고 했다.
그도 그 말이 너무 좋았다고 했다.
처음부터 만족감을 못 느낄 때마다 관계의 안정성을 흔들며 그에게 상처 준 적도 많았지만, 자주 싸우고, 예민한 모습을 많이 보여서 나 역시 내심 불안해졌는지, 이렇게 싸워도 내가 좋냐고, 여전히 나와 평생 함께할 거냐고 물었다.
그는 이렇게 화해만 할 수 있으면 괜찮다고 너와 함께할 것이라고 했다.
너무나도 안정감이 들었다. 지금처럼 사소한 것에 서운하고 화나고, 표현했는데 그의 입장 이야기를 듣고 더 답답해지고, 수많은 날들을 눈뜨고 지새워도, 결국 대화해서 풀고 서로를 품어줄 수만 있다면, 이런 것들로 인해 관계가 절대 약해지지 않고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더 단단해진다는 믿음만 있다면 혼자서 평온하고 잔잔한 것보다 둘이서 괴로운 것이 훨씬 더 행복할 것 같았다.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서운해지고 화가 난다는 것을 서로가 잘 알기 때문에, 그리고 각자의 결핍을 가진 우리가 때로는 주는 것이 조금은 아프고 힘들더라도 서로의 결핍을 채워주고 싶은 의지가 있기 때문에, 그게 진짜 사랑하는 방식이라는 것을 알게 때문에 둘이서 때로 괴로운 것이, 주지도 받지도 않으며 혼자서 고요한 것보다 훨씬 낫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