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함은 불안함인 줄 알았다. 남자친구가 너무 많은 이야기를 소상하게 해서 불안한지 알았다.
이를테면 외가 쪽 남자친척들이 모두 많지 않은 나이에 요절했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내게 건강검진 결과와 그 후속조치에 대해 꽤 자세하게 말해줬다.
콜라 마시는 것도 싫고, 햄버거와 피자와 해쉬브라운을 자주 먹는 것 같은 것도 싫었다. 만난 초반에는 혼자 밥 먹을 때 샐러드와 샌드위치를 주로 먹는 것 같더니, 이제는 나랑 만나면 페페로니 피자를 먹겠다고 하는 것이 싫었다.
함께 있을 때 콜라 마셔도 되냐고 물어보고, 갑자기 프랜차이즈 오븐스파게티와 피자를 먹고 싶다는 모습이 귀여워서 당연히 먹으라고, 같이 먹자고 했지만 혼자 있을 때면 그런 모습에 안정감이 안 느껴져서 불만이 올라왔다.
건강 챙기는 것은 책임감 있는 사람이 하는 가장 기본적인 일이 아닌가 싶었다. 친척 남자들의 명에 대한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 극단적으로 이 사람이 앞으로 15년만 더 사는 것이라면 어떨까 생각했다. 그래도 이 사람과 서로 사랑하고, 이 사람과 주어진 모든 시간에 감사하며 보내는 게 가치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두려움을 떨쳐버렸다.
이 사람에 대한 그 정도 확신이 있었다.
그런데 한참 붙어있다가 떨어져 혼자 생각할 시간이 많아질 때면 이 사람에게 기댈 수 있을까 싶었다. 상담선생님한테 전에는 연애할 때 기댈 수 있는 사람을 원했었는데, 이제는 더 이상 아니라고 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든든한 남자친구를 원하는 것이 진짜 마음이었다.
습도가 높은 날씨 탓인지, 하는 일이 잘 안 풀려서 그랬던 것인지, 내가 찾는 든든함과 안정감을 그가 채워주지 못한다고 섣불리 판단해 버린 탓인지, 불안과 불만이 가득한 익숙했던 내 모습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연애만 하면 더 불만이 가득해지는 그 모습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나 자신도 내가 원하는 대로 늘 실천하며 살기 어려운데, 연인이라는 타인을 너무 좋아하고 사랑한 나머지, 마치 그가 나의 연장선인 양 내가 나를 판단하듯 그를 판단하는 마음이 생겨나고 있었다.
혼자서 생각하며 잠깐 대화를 피하다가 다른 일로 싸움이 커져 마음속에 있던 말을 하게 됐다. 책임감과 안정감, 든든함에 대한 이야기를 이렇게 저렇게 늘려 장황하게 늘어놨다.
전에도 지나가듯 내가 그런 뉘앙스의 말을 할 때마다, 기댈 수 있는 남자친구가 되어주겠다고 말해주던 그였다. 여러 가지 말들 끝에 이번에도 그는 우리 사이가 전처럼 계속 가까웠으면 좋겠다고 했다.
너무나도 가깝던 마음이 내 솔직함에 갑자기 확 멀어진 것 같았다.
그래도 사랑하기 때문에 불안했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본질은 아무것도 변한 것이 없다는 것도 알았다. 그냥 내 마음이 더 커졌고, 그것 자체가 불안감을 증폭시킨 것뿐이라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았다.
폭풍이 지나갔나 했는데, 그는 일하다가 문득 내게 이런 모습을 보여줘서 미안하다고 했다. 더 책임감 있고 든든한 모습을 보여줘야 하는데 미안하다고 했다.
그날 오전에 회사에서 안 좋은 소식이 있었다고 했다.
자세한 이야기는 저녁에 통화하면서 해주겠다고 했다. 분명히 굉장히 안 좋은 일이 있는 것 같은데, 내게 미안하다고부터 말하는 모습을 보니, 몰아세웠던 내 모습이 떠올라 마음이 아팠다.
그리고 역시나 불안했다. 무슨 일일까 싶었다. 또 나는 최악의 시나리오를 떠올려봤다. 그리고, 내게 안 좋은 일이 있다면 그는 어떻게 했을까 생각했다. 무슨 일이 있든 묵묵히 내 옆에 있어줄 것 같았다.
내가 해 줄 수 있는 일도 무슨 일이 있든 담담하게 옆에 있어주는 일이겠다 싶었다. 확신을 느꼈던 처음 마음 그대로, 내가 오래 봐도 좋겠다고 알아봤던 그를 믿고 지지해 주는 것밖에 할 일이 없겠다 싶었다.
부서 사람들과 회식하고 돌아온 그는 통화로 내게 소상히 회사에 어떤 일이 있었고, 사람들은 어떻게 반응했고, 자신은 어땠는지 이야기를 들려줬다. 팀에서 고객사에 제공하던 서비스를 미국 본사의 결정으로 철수시키기로 한 것인데, 그래서 팀이 한순간에 갑자기 완전히 와해된다고 했다. 그래서 새로운 포지션으로 가야 한다고 했다. 세부적인 직무가 바뀌니까 생각보다 빨리 이직도 염두에 두어야 할 것 같다고 했다.
점심을 먹는데 토할 것 같은데 억지로 먹었고, 커피 마시다가 갑자기 속도 너무 안 좋아졌다고 했다. 내 생각이 제일 먼저 났다고 했다.
내게 담담하게, 소상하게 일어난 일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니까 불안했던 마음이 사르르 녹고 더 큰 안정감으로 채워졌다.
며칠 전 그는 자기가 말을 너무 많이 해서 불안하게 했던 것 같다고 했다. 난 그래도 솔직한 것은 엄청난 장점이라고 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내게 자세하게 다 이야기해주겠구나 싶었다. 그리고 연인에게 그것 하나 제일 일 순위로 바랐던 내가 떠올랐다. 과묵하고 조금은 무게 잡고 감정표현 잘 못하고 그래서 한편으로는 든든하고 안정감 든다고 느낄 수 있는 그런 사람 말고, 내게 모든 이야기를 소상히 할 수 있고, 느끼는 그대로 다 말해줄 수 있는 때로는 가벼워 보이는 남자, 하지만 더 깊이 알 수 있고 그래서 더 신뢰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을 만나고 싶었다.
그는 그런 사람이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다를지 몰라도 내게는 그런 사람이다. 이런 모습에 이런 저런 말들로 불안함을 내비치며 절대 바꿔서는 안되겠다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