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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센스 Aug 05. 2024

가족이 열명이면 기쁨이 열 배라는 그를 보며

정서적인 안정감을 채워주는 관계

같이 리얼리티 TV를 보다가 여자 출연자 중 한 명이 아버지에 전화하는 장면이 나왔다. 그분이 정서적으로 안정되어 보여서, 역시 아버지랑 사이가 좋아야 저렇게 안정되는 것 같다고 했다.


남자친구는 자기는 그렇게 생각 안 한다고 했다. 그 안정감 자기가 줄 수 없겠냐고 했다.


솔직히 말하면, 평생 듣고 싶은 말이었고 느끼고 싶은 감정이었다. 누군가가 나에게 꼭 그 얘기를 들려주지 않아도 엄청나게 안정적인 연애를 하며, 그리고 결혼을 해서 남편과 같이 지내며 어느 미래에 내가 느끼고 싶은 감정이었다.


‘지속되는 안정감을 찾았구나. ’라고 어느 미래에 느끼고 싶었다. 정신과의사나 심리상담사가 쓴 책에 있던 말, 그리고 유튜브에서 들었던 말. 내가 나의 부모가 되어주라는 말. 그리고 부모가 못 채워준 안정감을 동반자를 통해 결국 찾을 수도 있다는 말.


그 꿈을 살고 싶었다. 그래서 그렇게 연애에 매달렸다. 음.. 연애와 결혼 자체가 목적이었다기보다는 그 완전한 안정감이 목적이었다. 정서적으로 완전히 기댈 만한 사람이 아니라면 당연시 늦기보다는 빠르게 도중에 하차했다. 그래야 하루빨리 내 정착지를 찾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남자친구와 며칠 연락을 안 하고 지내는 동안 그가 내게 안정감을 줄 수 있을지 문득문득 생각했다. 난 작은 말 한마디에도 멘탈이 요동치니까 내게 싫은 소리는 최대한 하지 않도록 마음이 바다처럼 넓어야 하고, 그가 그의 인생을 아주아주 꾸준하고 성실하게, 그리고 스스로에게 엄격하게 살아가야 함께 걸어가는데 내 마음에 부담이 덜할 것 같았다.


그러다가 인스타그램에서 다정함에 대한 게시물을 보았다. 스스로에게 너무 엄격한 사람은 다정하기가 어렵다는 이야기였다. 무슨 말인지 너무 잘 알았다. 늘 자기 자신과의 약속이 우선인 사람은 연인을 위해 시간을 내주기 어렵다는 것이었다.


시간을 내준다는 것은 곧 마음을 내준다는 것이다.


때로 내가 하고 싶은 일과 해야 하는 일 앞에 내 연인의 마음을 채워주는 일을 두는 것이 내가 아는 다정함이다.


그는 다정했다. 만날 때만, 그의 하루의 빈 틈에만 잠깐잠깐씩 다정했던 것이 아니라 늘 다정했다. 지속되는 다정함이 내게 지속되는 안정감을 주었다. 내게 올인했던 그가 다시 보였다.


내 마음이 풀릴 때까지 전화기를 붙들고 같이 이야기를 나눠주던, 내가 와달라고 하면 언제든 와주던, 우리 집 근처와 동네에서 데이트하다가도 다시 집까지 데려다주던 그가 보였다.


그리고 그런 사람이 내가 원했던, 그리고 내가 필요한 사람이라는 것이 느껴졌다.


뜬금없이 일요일 오후 2시에 집과 반대방향인 7번 출구에서 만나자고 통보해 놓고서는, 토요일 밤에 긴장반 설렘반으로 전화를 걸었다. 우리 집에 와줄 수 있냐고 물었다.


약속한 날짜 하루 전이니까 그 정도면 꾹 참고 기다린 것 같았다. 그냥 애처럼 다짜고짜 와달라고 할 생각이었다.


그는 무슨 일 있냐고 물었다. 그냥 같이 있고 싶다고 했다. 준비하고 와주겠다고 했다.


한여름밤의 식물원 산책에서 돌아와 감귤맥주와 각종 팝콘 과자와 망고젤리를 사다 놓고 기다렸다. 오빠를 위해 준비했다고 했다. 핑크색 팝콘은 누가 봐도 네 취향이라고 했다.


안 그래도 사다 놓고 보니 그런 것 같아서 머쓱하긴 했는데, 망고젤리는 좋아한다고 한 것 아니냐고 했다. 맞다고 했다. 그는 감귤맥주의 오렌지색 캔이 취향저격이라고 했다.


그럴 줄 알았다. 나도 원래 쨍한 오렌지색을 좋아했지만 그가 오렌지색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나서 더 적극적으로 오렌지빛 나는 것들을 애호하게 되었다. 내 색으로 지정해 준 살구색 옷과 패션 아이템을 더 자주 사게 되었고, 자연스레 오렌지색 나는 것들이게 더 손이 가게 되었다.




사내 새 포지션 면접 결과는 어떻게 되었냐고 물었다. 그는 안 됐다고 했다. 언제 발표가 났냐고 했다. 그때 너랑 이야기했을 때라고 했다. 내가 시간을 가지겠다고 한 그날이었다.


그냥 눈물만 흘렀다. 제일 힘들 때 내가 힘을 주지 못했다는 생각에 미안한 마음뿐이었다.


어쩌면 그때 나는 나쁜 소식을 감당할 마음의 여유가 없었는 지도 모른다. 그 전날도 우리는 행복하게 시간을 보내며 웃고 사랑을 표현했지만, 그 수요일에 회사에 출근해 있는 동안 뭔가 다른 분위기에 불안했다.


마음이 불안해지니 이런저런 부정적인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날 느꼈다. 그가 내 부정적인 말들을 감당할 수 없는 상태라는 것을. 그래서 혼자 시간을 가지겠다고 했다. 헤어질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그냥 내가 혼자 내 감정을 해소하고 나서 옆에 있어주겠다고 했다.


그에게 그래도 이런 상황이 지금 일어나서 다행인 것 아니냐고 했다. 내가 일 쉬고 있고 우리 아기가 기어 다니고 있는데 이렇게 직업적으로 불안해지는 것보다는 낫지 않냐고 했다.


그는 그가 언젠가 봤던 매체 속의 한 장면을 이야기해 주었다. 어떤 사람이 혼자일 때보다 둘이면 더 힘든 것 아니냐고 물었다고 한다. 대답하는 사람은 아니라며, 행복이 두 배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가족이 2명이면 2배로 더 행복하고, 3명이면 3배로 행복하고, 10명이면 10배로 더 행복한 것이라고 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게 곧 그의 생각이었다. 힘든 일이 있을 때 부양할 가족이 있으면 마냥 더 부담되고 힘든 것이 아니라, 그만큼 행복도 더 커진다고 생각하는구나 싶었다.


나와는 너무 달라서 놀랐다. 그리고 너무나도 크게 안심이 되었다.


나는 연애를 할 때마다 상대가 지우지도 않은 부담에 힘들어했다. 결혼해서 아이가 생기고 부양할 가족이 생기면 혼자일 때보다 훨씬 더 부담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순간순간의 충만한 행복감보다는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부담감에 대해 더 많이 생각했다. 그래서 같이 있을 때는 웃고 떠들고 행복한 모습은 다 보여주다가 떨어져 있을 때면 현재에 머물지 못하는 걱정인형이 되었다.


나와는 다른 이 사람의 이런 사고방식을 보니, 그리고 힘들어하면서도 여전히 아주 구체적으로 먹고 싶은 게 있고, 나와 가정을 꾸리는 것을 그리고, 내게 행복을 줄 수 있을 것 같다고, 어려운 것이 아니라고 자신 있게 말하는 그를 보니 내게 필요한 것이 딱 이런 것이구나 싶었다.


반장난으로 회사에서 60살까지 일하고 65살까지 일할 수 있으면 일하겠다고 했다. 그는 하루빨리 회사 나오고 싶어 하는 너인데, 이런 말 하게 해서 미안하다고 했다. 그런 말도 가볍게 나누는 우리가 좋았다.


평소랑 똑같이 장난치고 역할극 하면서 노는데, 서로를 웃게 해 줄 수 있다는 것이 그냥 좋았다.


막연한 불안감에 늘 미래의 안정감이라는 보이지 않는 울타리를 만들어나가려 발버둥 치며 산다. 하지만 행복은 순간순간의 기쁨과 웃음에 있지, 막연한 미래의 안정감에 있지 않다. 오히려 순간의 기쁨들이 삶이라는 불안감을 온 힘을 다해 헤쳐나가는 원동력이 된다.


사랑을 하며 가장 중요한 것은 서로에게 정서적 안정감을 줄 수 있는 지이다. 그가 주는 안정감 속에서 감사하며 삶을 누리고, 그가 힘들 때에도 내가 정서적인 안정감을 줘야겠다는 삶의 목적을 위해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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