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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골책방 Mar 05. 2024

공감, 암 환자를 대하는 자세

암 생존자

매년 11월만 되면 나는 특별한 이유도 없이 마음이 뭉클해지곤 했다. 이런 일이 있으려고 마음이 그리도 아팠던 것일까. 차가운 바람이 코끝을 매섭게 스치던 11월의 어느 날, 아직도 나는 그날을 잊을 수가 없다.      


병원 생활은 생각보다 길지 않았다. 나는 양쪽 옆구리에 동그란 피 주머니를 달고 생활했다.

강한 진통제 때문인지 아니면 수술 당일 날 겪었던 극심한 고통과 비교해서 상대적으로 괜찮다고 느꼈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통증은 대체적으로 참을만했다. 다만, 보형물을 넣은 가슴이 돌덩이가 들어있는 것만 같이 불편했고 그 돌덩이가 흘러내려 피부를 뚫고 나올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수술 다음 날 오전에는 선생님께서 회진을 오셔서 암세포가 유두 가까이까지 있었지만 바로 밑 조직을 파내다시피 해서 유두를 살려내기 위해 노력하셨고 다행히 유두를 살려낼 수 있었다는 말씀을 하셨다. 그렇게 애를 쓰신 선생님께 나는 왜 유두를 살려냈냐며 칭얼댔다. 유두를 살려낸 경우 재발 확률이 조금 올라간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긍정적인 반응을 기대하고 말씀하셨던 선생님께서는 머쓱해하시는 듯했고 수술 후 조직검사에서 병기가 바뀔 수도 있는 거 아니냐며 불안에 떨며 묻는 나에게 그런 일은 많지 않다며 나를 다독여주셨다. 내가 암 진단을 받고 수술을 받을 병원을 선택할 때에도 환우들이 모여있는 인터넷 카페에 있는 정보들을 참고했는데 환우들마다 의견이 달랐다. 대부분의 환우들은 무조건 빅 5안에 드는 병원에 가야 한다고 했고, 또 어떤 환우들은 빅 5 병원의 의사들은 차갑고 거만한 태도 때문에 질문 하나 하는 것도 어려울 뿐 아니라 어떤 의사들은 환자의 질문에 호통을 치기도 하고 애초에 살벌한 분위기를 조성해서 질문을 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게 하는 의사들도 있다며 불평을 하는 환우들도 많았다. 여러 환우들의 의견을 듣다 보니 병원을 결정하는 기준이 명확해졌다. 이렇게 큰 질병을 진단받은 환자는 극도의 불안감에 휩싸이게 되는데 의사의 거만한 태도로 질문조차 하기 힘든 상황이 된다면 내 불안감이 극에 달하게 될 것은 불 보듯 뻔했다. 그래서 나는 다른 환우들에게 실력과 인격을 모두 갖춘 의사 선생님이 계신 병원을 추천해 달라고 했고 많은 환우들의 추천을 받아 수술할 병원을 결정하게 되었다. 물론 다른 환우들과 마찬가지로 병원을 결정하는 과정에서 여러 병원을 가보고 다양한 소견을 듣기 위해 빅 5 안에 드는 병원을 가보기도 했지만 넘쳐나는 환자들과 병원 시스템이 마치 수술 공장에 온 것 같은 느낌이 들었고 지금 진료를 보고 있는 이 의사가 나를 기억이나 할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그런 과정들을 통해 수술할 병원을 선택하게 되었는데 예상대로 선생님은 따뜻하고 친절했다. 환자의 이야기를 경청해 주셨고 질문에 친절하게 답을 해주셨으며 불안에 떠는 나를 안심시키고 따뜻하게 대해주셨다. 더불어, 환우들이 모인 카페에 자주 드나드는 건 정신건강에 좋지 않으니 어느 정도 정보를 얻었다면 더 이상 카페는 보지 말라고 조언을 해주시기도 했다. 미칠 것 같은 공포감에 휩싸여 있던 그때, 냉소적이고 불친절한 선생님을 만났더라면 얼마나 더 큰 불안감에 휩싸였을지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며칠간의 병원 생활을 하는 동안 나는 불안한 마음으로 조직검사 결과를 기다렸다. 제발 병기가 바뀌지 않기를 바라고 또 바랐다. 같은 병실의 환우들과 한 번씩 대화를 나누기도 했는데 어떤 환우는 나에게 젊은 환우이니 더 조심을 해야 한다며, 어떤 젊은 환우는 1기 진단을 받았었는데 1년 만에 전신의 뼈에 암이 전이되어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상태로 재입원을 하게 되었다는 얘기를 해주며 내 불안감에 불을 지폈다. 병원에서는 한 번씩 입원 중인 유방암 환우들을 위해 식단이나 생활방식, 운동방법 등에 대한 교육이 이루어졌는데 병변이 있던 팔은 수술할 때 림프전이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겨드랑이 림프절을 절제하는데 그 후유증으로 림프부종이 발생할 수 있으니 병변이 있었던 팔에는 채혈, 주사, 혈압측정을 금지해야 하고, 2kg 이상의 물건은 절대 들지 말 것과 심지어 반지조차도 끼우면 안 된다고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다른 사람들처럼 평범하게 가정을 이루고 예쁜 딸아이를 낳아 키우고 싶은 꿈을 놓지 못하고 있었기에 그 교육을 받고 나서는 또 한 번 큰 충격에 빠졌었다. ‘나는 아이를 낳는다 해도 내 아이를 안아줄 수조차 없다는 말인가!’ 이런 현실이 너무 비극적으로 느껴졌고 믿기지가 않았다. 이 모든 것이 꿈만 같았고 현실로 느껴지지가 않았다. 나는 매일 아침 병실에서 눈을 뜰 때마다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것은 마치 타임루프 영화에서 매일 반복되는 하루에 갇혀버린 주인공이 아침에 침대에서 눈을 뜨자마자 화들짝 놀라는 모습과 흡사했다. 환자복을 입고 병원 침대에 누워있는 것이 꿈이 아닌 현실이라는 것을 자각하는 순간, 놀란 마음에 비명을 지르고 싶은 충동이 생기기도 했다. 입원한 지 3일째 되던 날은 엄마가 몇 가지 물품을 더 챙겨 오기 위해 집에 잠깐 가셨는데 그날 나는 공무원 필기시험에 합격했다는 문자 통보를 받게 되었고 그 소식을 곧바로 엄마에게 전했다. 원래대로였다면, 그렇게 내가 수없이 상상했던 대로라면 그날은 부모님과 내가 쾌재를 부르며 기뻐해야 할 날이었지만, 시험 합격 소식에 엄마와 나는 함께 뜨거운 눈물을 흘려야만 했다. 그렇게 며칠을 지내고 퇴원을 하는 날, 그토록 기다리던 조직검사 결과를 듣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초기가 아닌 2기의 유방암이며 다행히 다른 부위에 전이는 없지만 일반 암과 함께 섞여 있던 상피내암의 경우 그 크기가 무려 12cm나 된다는 것과 내 요청으로 예방적 절제를 했던 왼쪽 가슴에도 암이 되기 직전 세포인 ‘비정형세포’가 발견되었다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그리고 이어서 앞으로의 치료 과정에 대한 설명을 듣게 되었는데 나는 여성호르몬의 과다분비가 발병 원인이며 5년 전만 해도 병기가 2기인 경우 무조건 주사 항암치료를 받아야 했지만 이제는 외국에 내 조직과 정보들을 보내서 항암치료를 했을 경우와 안 했을 경우 재발확률의 차이를 파악해 볼 수 있는 ‘맘마프린트’라는 검사를 하게 되고 그 결과에 따라 주사 항암치료 여부가 결정된다고 했다. 주사 항암치료를 받게 될 경우 매우 강력한 항암 주사를 4번 정도 맞게 될 것이고 주사 항암치료가 면제될 경우 여성호르몬을 차단시키는 경구용 항암제를 처방받아 복용하게 될 것이라는 의사 선생님의 설명이 이어졌다. 머릿속이 복잡해졌고 정신을 차리기가 힘들었다. ‘항암치료를 받게 된다면 머리카락이 다 빠질 텐데 가발을 쓴 채로 공무원 시험 면접을 봐야 하나?’ 하는 생각서부터 오만가지 생각이 들었다. 의사 선생님의 설명이 끝난 후에 나는, 항암치료를 받게 된다면 면접을 볼 때까지 치료 일정을 일정기간 늦출 수 있는지를 물었다. 다행히 의사 선생님은 어느 정도는 치료 일정을 늦출 수 있다고 했다. 우리는 일상에서 ‘패닉’이라는 단어를 자주 사용한다. 난 그제야 알았다. ‘패닉’이라는 말은 그렇게 아무 때나 함부로 사용하는 말이 아니라는 것을. 그야말로 나는 패닉 상태라는 것이 어떤 건지 제대로 실감할 수 있었다. 무슨 정신으로 집까지 왔는지 기억이 잘 나질 않는다. 엄마와 함께 집으로 돌아오는 택시 안에서 심한 구역감을 느꼈고 극도의 공포감과 불안감이 내 정신과 육체를 잠식해 가기 시작해서 급기야 집에 도착한 지 몇 시간이 채 지나지 않아 수술했던 병원의 응급실로 돌아가게 되었다. 나와 엄마가 병원 응급실에 도착했을 때, 마침 자살을 기도한 젊은 여성이 구급차에 실려 들어왔다. 여성의 손목에는 칼로 여러 번 그은 것 같은 상처가 보였지만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려 고개를 돌렸다. 급한 마음에 응급실에 가긴 했지만 응급실에서 나한테 해줄 수 있는 것은 사실상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신경안정제 한 알만을 처방받아 집으로 돌아왔다. 조직검사 결과만 듣고 나면 마음이 한결 편해질 줄 알았는데 끝이 아니었다. 외국으로 보낸 ‘맘마프린트’ 검사 결과에 따라 항암치료 여부가 결정될 뿐만 아니라 유방암의 타입을 보는 추가 검사가 한 가지 더 이루어졌는데, 유방암은 암 타입에 따라 치료 과정이 훨씬 더 힘들어지기도 하고 예후에도 차이가 있기 때문에 초초하게 기다려야 할 검사 결과가 두 가지나 더 남아 있었던 것이다. 유방암 진단을 받은 시점부터 수술을 하고 퇴원 후 추가 검사 결과를 기다리며 극도의 공포감으로 정신이 반쯤 나간 채로 지옥 같은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던 그때, 그리고 이후 투병생활을 하는 동안까지도 가족과 주변 지인들에게 그 어느 때보다 위로와 공감을 받아야 하는 그 시점에, 나는 오히려 그들로 인해 마음에 큰 상처를 받게 되었다.       

   

우리는 타인의 감정에 얼마나 공감하며 살아가고 있는가. 그동안 나는 사이코패스를 제외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느 정도의 공감능력은 기본적으로 장착되어 있다고 믿어왔었다. 하지만 내가 암 진단을 받고 도저히 말로 표현할 수조차 없는 공포와 패닉 상태에 빠져있을 때 정말 놀랍게도 내 주변의 많은 사람들은 내 감정에 전혀 공감을 하지 못했다. 아무리 의학기술이 좋아졌다고는 해도 암은 우리나라 사망원인 3위안에 드는 그야말로 ‘죽음’을 연상케 하는 질병이다. 내가 수술을 하루 앞둔 날, 나는 아버지에게 너무 무섭다며 나의 불안감을 호소했다. 하지만 오랫동안 복용해 왔던 정신과 약의 부작용 탓인지  가끔씩 이상한 행동을 하기도 하고 점점 감정이 메말라가는 모습을 보였던 아버지는 내가 입원해 있는 동안 본인이 혼자 끼니를 챙겨 먹어야 할 상황에 대한 걱정만을 하셨고 하나뿐인 형제인 오빠는 너무 무섭다는 나의 문자에 “뭐가 무서운데?” 라며 내 감정에 전혀 공감하지 못하는 짧은 한마디만을 답장으로 보내고는 수술을 한 다음 날에도 나의 안부를 묻는 연락조차 없었다. 며칠이 지나서야 올케언니와 조카를 데리고 잠깐 병문안을 다녀갔는데 이미 서운한 맘이 자리 잡은 탓이었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오빠네 부부가 병문안을 온 것이 마치 해야 할 숙제를 해치우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며칠 후 올케언니는 아직 퇴원도 하지 않은 나에게 전화를 해서는 보험금으로 얼마를 받았는지를 물었고 운영하고 있는 식당의 상하수도 공사때문에 돈이 필요하다며 2천만 원 정도를 빌려줄 수 있냐는 말을 했다. 오빠네 부부는 유명한 식당을 운영하면서 한 달에 1-2천씩의 수익이 있었고, 이미 많은 재산이 있는 오빠네 부부가 공사 비용이 없을 리는 만무했다. 그것은 정말 나에게 돈을 빌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큰 병에 걸린 내가 혹시나 병원비를 이유로 손을 내밀까 싶어 미리 차단하고자 함이었음을 단박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동안 서로 마음을 의지하고 지냈던 친구들도 마찬가지였다. 유일한 미혼의 친구로서 나랑 꾸준히 소통을 이어가던 친구 한 명은 내가 암 진단을 받았다는 소식을 듣고는 한동안 연락이 끊겼다. 나는 ‘내 불행이 본인에게 옮기라도 할 것 같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고, 초등학교 시절부터 지금까지 오랜 시간을 함께 해왔던 친구는 병문안을 와서는 불안해하는 나를 굉장히 의아한 표정으로 쳐다보았고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말투로 본인이었으면 하나도 무섭지 않았을 것 같다면서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매일 감사일기를 써보라는 말을 할 뿐이었다. 아직도 그때 그 친구의 눈빛이 잊히지가 않는다. 내가 암 진단을 받기 몇 해 전 그 친구가 건강검진차 받았던 유방암 검진에서 조직검사를 받게 되었다며 결과를 기다리는 동안 매우 초조하고 불안해하며 나에게 전화를 했었던 기억이 생생했다. 본인의 일이었어도 그렇게 말할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상 엄마를 제외한 가족과 지인들은 내 감정에 전혀 공감을 하지 못했고, 나는 내 인생에서 가장 어두운 밑바닥에 놓여 있던 결정적인 순간에 모두가 내 손을 놔버린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로 인해 나의 공포감과 불안감은 더욱더 극에 달하게 되었는데, 이와 같은 나의 경험이 나만이 겪은 특별한 경험이 아니었다는 것을 다른 환우들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많은 환우들이 나와 같은 경험을 했고, 그로 인해 인간관계가 많이 정리가 되었다는 글들을 보게 되었다. 어떤 환우의 친언니는 동생이 계속 불안해하는 것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고 동생을 예민하고 나약한 사람으로 취급을 해왔다고 한다. 그러던 중 환우의 언니가 직장 건강검진에서 유방에 이상소견으로 조직검사까지 하게 되었는데 그 조직검사 결과를 기다리는 동안 피가 마르는 불안감에 이성을 잃었던 것이다. 다행히 조직검사결과는 이상이 없었지만 그제야 언니는 동생의 마음을 이해하게 되어 동생에게 사과를 했다는 내용의 글도 있었다. 나의 지인 중에는 나보다 1-2년 정도 먼저 유방암 진단을 받은 언니가 있었다. 그 언니의 친구는 유방암은 치료가 쉬운 암이 아니냐며 불안해하는 언니를 이해하지 못하는 듯 말했고 그 친구의 말에 기분이 상한 언니는 친구에게 “너도 꼭 유방암에 걸렸으면 좋겠어!”라는 말을 끝으로 그 친구와의 인연을 정리했다고 한다. 나 또한 투병 생활을 하는 동안 내 주변인들로 인해 깊은 상처를 받았지만 나는 그들을 정리하진 않았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후에 그들을 통해 본인이 그런 행동을 하게 된 사정에 대해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는데 어느 정도 납득이 가는 내용들이었다. 불안해하던 나를 의아하게 쳐다봤던 나의 오랜 친구는 그도 그럴 것이, 그 친구의 남편은 그 당시 희귀 암 말기 판정을 받고 투병 중이었다. 친구 남편은 특전사 출신에 워낙 강인한 신체와 정신력을 가지고 있던 사람이었고 직업 또한 타인의 죽음을 자주 접할 수밖에 없는 일을 하고 있었다. 시한부의 삶을 살고 있었지만 친구의 남편은 늘 씩씩했고 타인의 죽음을 자주 봐왔던 사람이라 그런지 자신이 처한 상황을 덤덤히 받아들이는 듯했다. 늘 그런 남편을 봐왔던 친구가 자신의 남편과 비교해 훨씬 나은 상황의 내가 공포감에 덜덜 떠는 모습에 공감할 수 없었던 일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나의 암진단 소식을 듣고는 연락을 끊었던 유일한 미혼의 친구는 오래전부터 턱관절 장애로 인해 고통을 받고 있었다. 턱관절 장애라는 것이 흔하지도,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져 있지도 않은 질병이었던 탓에 본인이 지인들에게 아무리 고통을 호소해도 상대방은 공감을 잘하지 못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었다고 한다. 그때 친구는 어차피 자신이 아닌 이상 아무도 이 고통에 공감할 수 없다는 것에 실망감을 느꼈고 그 이후로 누군가에게 자신의 고통을 털어놓지 않고 한동안 외출도 삼가며 두문불출했다고 했다. 내 암 진단 소식을 들었던 그 친구는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생각을 했고 어차피 100% 공감을 하지도 못하면서 어쭙잖은 위로를 할바엔 잠시 나를 내버려 두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고 했다. 그것이 그 친구가 나를 위로하는 방식이었던 것이다. 그 친구의 이야기를 듣고 돌이켜보니 나 또한 그 친구의 고통을 그리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 같았고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나는 투병 생활을 하는 동안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겪어보지 못한 일에 대해서는 타인의 감정에 공감을 잘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근무하던 곳에 계시던 한 상급자는 투병 중인 나를 위로하며 자신의 경험담을 말씀해 주셨는데, 본인도 사고 후유증으로 인한 극심한 육체적 고통으로 스스로 생을 마감할 생각도 여러 번 했었다고 하셨다. 처자식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지금까지 살고 있지만, 아직도 일 년에 몇 번씩은 ‘계속 이렇게 살아서 뭐 하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면서 그래도 자신보다 더 어려운 처지의 사람들을 위해 봉사활동도 하면서 긍정적으로 살아가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말씀을 하셨다. 덤덤히 말씀을 이어가면서 자신의 이야기를 해주시는데 듣는 동안 처절했던 고통의 시간들이 고스란히 느껴져 마음이 몹시 아팠다. 나중에 다른 직원들을 통해 들은 바로는, 그분은 골프연습장에서 타인의 골프채에 얼굴을 맞아서 뇌진탕과 얼굴의 반이 부서지는 사고를 겪으셨고, 그 후유증으로 아직까지도 고통을 겪고 계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얼마 후 나는, 남들보다 승진이 빨랐던 그분에 대해서 다른 직원들이 나눴다는 대화 내용을 전해 듣게 되었는데 “윗사람들이랑 골프를 치다가 골프채에 맞은 건가? 그럼 우리도 한 대 맞아주면 승진이 빠르려나?”라는 이야기를 했었다는 말을 듣고는 심한 충격을 받았었다. 사람들은 그분의 고통을 가볍게 입에 담고 있었다. 그 얘기를 들은 나는 ‘아. 그런 거구나. 나의 고통도 타인에게는 그냥 가십거리일 뿐이겠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공무원에 임용된 후 얼마간 근무를 하다가 근무지에서의 인간관계에 대한 스트레스와 점점 심해지는 항암제 부작용으로 인해 몸도 마음도 지칠 대로 지쳐 결국 질병 휴직을 내게 되었는데, 그나마 관계가 원만했던 남자 상급자에게 질병 휴직을 내야 할 것 같다는 말을 하자 위로나 격려의 말이 아닌 "그럴 줄 알았다"는 뜻밖의 말을 듣게 되었다. ‘통계’상 건강이 좋지 않은 내가 결국 질병 휴직을 내게 될 줄 알았다는 말을 하였고, 마치 복직을 하지 않고 그만두게 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뉘앙스의 말까지 했다. 힘든 상황에 놓인 나에게 저주를 퍼붓는 것인지. 휴직까지 하게 된 내 감정이 당연히 좋을 리 없는데 내 감정에 대한 공감과 이해는 전혀 없이 ‘통계’라는 단어를 언급하는 걸 듣는 순간 심한 불쾌감이 들었다. 그리고 나는 결국 질병 휴직을 한지 얼마 되지 않아 몸 상태가 급격히 악화되어 요양 병원에 입원을 하게 되었고, 극심한 항암제 부작용과 자율신경실조증, 불안장애, 그리고 엎친데 덮친 격으로 뇌종양으로 인한 한쪽 귀의 청력 소실과 청각 과민증, 이명으로 그야말로 내 인생 최대의 고비라고 할 만큼 힘든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도 나의 오빠는 내 멘털의 나약함을 문제 삼으며 힘든 내 마음을 전혀 공감하지 못했다. 미혼 여성이 유방암으로 양쪽 가슴을 다 절제하고 항암제로 인해 출산의 가능성마저 희박해진 상황에, 이제는 한쪽 귀의 청력까지 잃게 되었는데 도대체 이보다 얼마나 더 극단적인 상황이어야 내 고통이 정당화될 수 있다는 말인가!   

  

우리는 미디어를 통해 접하게 되는 나와 전혀 관계없는 사람의 아픔을 보고도 쉽게 공감하며 안타까워한다. 먹을 것이 없어 구정물만 마시며 앙상하게 뼈만 남은 아프리카 아이들을 보면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들의 아픔에 공감하며 안타까워하지 않는가. 타인의 좋은 일에 같이 기뻐해 주는 것보다 어려운 일을 겪고 있는 타인의 아픔에 같이 아파하고 동정하는 마음을 갖는 것이 더 쉬운 일이 아니던가. 하지만, 매체를 통해 접하게 되는 아이들처럼 그 정도의 극단적인 모습을 하고 있는 경우가 아니라면, 사실상 사람들은 타인의 고통에 쉽게 공감하지 못하는 경우가 더 많은 것 같았다.           

퇴원을 하고 며칠 뒤, 병문안을 다녀갔던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친구는 내 아픔에 전혀 공감하지 못했던 자신의 경솔했던 행동에 대해서 사과를 했다. 정혜신 교수의 ‘당신이 옳다’라는 책을 읽고 나서야 두려움에 떨던 나를 이해해 주지 못한 것이 얼마나 잘못되었는지 깨닫게 되었다고 말했다. 게다가 말기암 투병 중인 자신의 남편에게 내 얘기를 하며 충분히 치료가 가능한 상황에서 불안해하는 내 모습이 이해가 안 된다는 말을 했다가 늘 씩씩해 보였던 남편의 속마음을 듣게 되었는데, 친구의 남편은 자신이 겉으로 아무렇지 않게 행동한다고 해서 아무렇지 않은 게 아니라며 암 환자는 살아도 사는 게 아니라고, 당신은 절대 이해할 수 없을 거라며 친구를 질책했던 모양이었다. 의학기술의 발달로 암 진단을 받고도 생존을 하는 환자들이 많이 늘어나고 있다. 그로 인해 암생존자들은 생존은 했지만, 이후 투병과정에서나 또는 사회에 복귀를 하고도 여러 가지 육체적, 심리적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그래서인지 요즘은 의료계에서도 이런 문제에 관심을 많이 기울이고 있고, 많은 병원에서 암생존자들을 위한 육체적, 심리적 지원 프로그램을 다양하게 운영하고 있다.   

  

사실, 갑상선암이나 유방암 환우들이 유독 나와 같은 일을 많이 겪는다. 치료가 가능한 암이라고, 완치율이 높은 암이라고 사람들은 쉽게 말한다. 하지만 갑상선 암으로 죽는 사람들도 있다. 위치의 특성상 임파선으로 전이가 될 확률이 있고 유방암도 겨드랑이와 가까운 위치 때문에 림프전이가 될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또한 사람들이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 중 하나가 생존율이다. 유방암 생존율을 검색해 보면 굉장히 높은 생존율을 확인할 수 있는데 통계에서 확인되는 생존율은 5년 생존율이고 실제로 유방암은 꼬리가 긴 암이라고 해서 5년 후에도 재발을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기간을 좀 더 길게 보면 생존율은 확연히 떨어진다. 그리고 이런 이유들을 차치하고라도 ‘암’이라는 단어 자체가 주는 무게감이 있지 않은가. 최근 ‘암환자를 대하는 자세’라는 제목의 유튜브 영상을 보게 되었는데 그 영상에서 의사들은 말한다. 암 환자에게 “그 암은 치료가 쉬운 암이잖아?” “완치율 높은 암 아니야?” 이런 말은 절대 금물이라고 말이다.     


'큰 병에 걸린 사람이 불안감을 호소한다' 이것은 공감하기에 난해한 상황이 아니라 나와 전혀 관계없는 타인의 일이라 해도 너무나 쉽게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상황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그들은 왜 나의 감정에 공감하지 못한 걸까? 그들은 모두 사이코패스인 걸까? 투병을 하면서 겪은 이런 일들로 인해 타인에 대한 ‘공감’이란 것에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고, 친구가 말한 정혜신 교수의 '당신이 옳다'라는 책을 포함한 여러 심리학 책들을 통해 공감도 배워야 할 수 있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쩌면 ‘공감’이라는 것은 ‘마음’의 문제가 아니라 ‘기능’의 문제일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리고 나 자신도 되돌아보게 되었다. 나는 그동안 타인의 감정에 얼마나 공감을 해주었던가. 분명 나 또한 타인의 감정에 공감하지 못하고 누군가에게 상처가 되었던 일이 있었을 것이다. 한 예로, 나는 이혼한 사람들의 고통을 잘 공감하지 못했었다. 이혼 후 오랫동안 힘들어하는 사람들을 보면 속으로 ‘요즘 세상에 이혼이 흠인가?’ 하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질병 휴직 기간에 지인의 추천으로 보게 된 ‘돌싱글즈’라는 예능 프로그램을 통해 이혼한 사람들이 이혼 후 겪는 고통의 시간들과 그 긴 터널을 지나 행복을 맞이하게 된 과정들에 대해 낱낱이 알게 되면서 그제야 그들의 감정에 공감할 수 있게 되었다. 암 진단 후 투병을 하는 동안 내 맘 속 깊이 상처를 남긴 여러 사건들을 되짚어 보면서 나는 많은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내가 아닌 이상 상대방은 나를 100% 이해할 수도 공감할 수도 없다. 하지만 내 경험을 통해 그리고 다양한 심리학 책들을 통해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된 사실은, 타인의 감정에 대한 ‘공감’의 표현이 상대방에게 주는 심리적 안정 효과는 실로 어마어마하다는 사실이다. 그러니 상대방을 맘 속 깊이 온전하게 이해하지는 못하더라도 우리는 살아오면서 쌓인 매뉴얼이 있지 않은가. 어린 시절 영어를 배울 때 "Thank you"에 대한 대답으로 "You're welcome"을 한 세트로 공식처럼 외우듯, 아픈 사람에게 "어쩌니... 많이 힘들겠다" 그냥 이 정도 말은 상대방에 대한 깊은 공감 없이도 공식처럼 나올 수 있는 말이 아닐까? 이 정도의 말은 인공지능 로봇한테 말을 해도 충분히 들을 수 있는 말일 것 같다. 상대방의 마음을 진심으로 이해하고 하는 말이라면 더 좋겠지만, 꼭 그렇지 않아도 좋다. 암 진단을 받은 직후 심한 정신적 충격으로 오빠한테 두려운 내 마음을 털어놓았을 때 오빠는 내 감정에 전혀 공감을 하지 못했지만 나는 엄마에게 “그래도 오빠한테 내 감정을 털어놓고 나니까 기분이 조금 나아진 것 같아”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위로는 말이나 행동이 아니라 ‘존재’라는 말이 있다. 내가 나의 감정을 털어놓을 수 있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 순간 나의 공포감과 불안감을 경감시키는데 큰 도움이 되었던 것이다. 마음속 깊이 공감하지는 못하더라도 그저 한마디 위로의 말이면 된다. 아니, 그것도 못하겠으면 그냥 상대방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한숨이라도 쉬어주는 것은 어떨까?      


정혜신 교수의 ‘당신이 옳다’라는 책에서 가장 마음에 와닿았던 문장이다.

“내 눈길이나 숨결, 신음 같은 한숨 등이 말보다 더 또렷한 말이 된다. 내 고통에 진심으로 눈을 포개고 듣고 또 듣는 사람, 내 존재에 집중해서 묻고 또 물어주는 사람. 대답을 채근하지 않고 먹먹하게 기다려주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상관없다. 그 사람이 누구인가는 중요하지 않다. 그렇게 해주는 사람이 중요한 사람이다. 그 '한 사람'이 있으면 사람은 산다”     


또한, 책에서는 충조평판(충고, 조언, 평가, 판단) 날리지 말고 공감을 하라는 내용이 나오는데

나는 개인적으로 "그런 생각은 잊어라, 너한테 좋을 게 없다"라는 말과 "긍정적으로 생각해라"라는 말이 가장 싫었다. 고통스러운 과거의 기억을 되새기고 싶어 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을 것이다. 생각은 하. 는. 때도 있지만 대체적으로는 내 의도와는 상관없이 저. 절. 로. 일어나는 게 생각이기 때문이다. 또한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게 안 돼서 힘든 건데. 누구나 타고난 신체적 건강이 다르듯, 타고난 정신적 건강도 모두 다르다. 같은 일을 겪었다고 해서 모두가 같은 반응을 보이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는 작은 일에도 무너진다. 그렇다고 해서 그 사람의 감정이 틀렸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 사람이 느끼고 있는 감정이 그렇다면 그것이 맞는 거다. 그 감정이 옳다는 것이다.     


육체적 고통을 통해 내적인 성장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고통을 겪고 있는 이들에게 조언한다. 이 시간들을 내면을 성장시키는 기회로 삼으라고. 하지만 육체적 고통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질병으로 인해 숨 쉴 틈 없이 바쁘게 돌아가던 일상을 잠시 멈추고 쉬어가면서 지난날을 되돌아보고 삶의 의미나 가치에 대한 깊은 사유를 통해 내적인 성장을 이룰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인생의 어떤 시련을 겪음으로써 그 계기가 마련된 것일 뿐, 육체적 고통의 직접적인 효과는 아니다. 더군다나 그 육체적 고통이 과거형이 아닌 현재진형형이라면 더더욱 육체적 고통으로 인한 내적 성장은 불가능하다. 이미 수천 년 전에 석가모니 부처님도 고행주의에 이끌려 육체적 고통을 통해 정신적 깨달음에 이르기 위해 노력했으나 지독한 육체적 고통은 정신의 안정을 얻을 수 없게 방해하고 고통으로 인해 순일한 사고를 갖기 힘들다는 것을 깨닫고 고행을 멈추셨다. 이와 같이 육체적 고통, 그 자체로는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극심한 육체적 고통은 맑은 정신을 유지할 수 없도록 방해하며 절망과 좌절만을 줄 뿐이다.     


사람들은 나에게 말한다.

누구는 사고로 반신불수가 되었다더라,

저기 TV에 나오는 저 사람을 봐라. 그래도 저 사람은 저리 밝게 살지 않느냐.

너는 그에 비하면 훨씬 나은 거다.     


요즘 일부 심리학 강의에서는 타인의 고통을 보고 위안을 삼는 사람들을 ‘소시오패스’라고 칭하기도 한다. 하지만, 사실 많은 사람들이 나보다 안 좋은 상황의 사람들을 보며 위안을 삼는 경우가 많다. 그것 자체를 비난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나 또한 TV에 나오는 어려운 사람들을 보며 위안을 삼았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괴로움이 일정 수준 이상을 넘어가면 그런 생각조차도 할 수 없게 된다. 내 고통이 극심할 때는 오히려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들의 영상을 보는 것조차 힘들다. 지금의 내 현실도 고통인데 TV 시청을 하면서까지 고통에 신음하는 사람들을 보는 것은 나를 더 괴롭게 할 뿐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나에게 강해질 것을 요구한다. 왜 나는 나보다 더 힘든 상황에서도 꿋꿋이 살아가는 사람들과 비교당하며 내 상황을 아무렇지 않은 상황으로 받아들여야 하고 지금의 내 고통이 나약함으로 치부돼야 하는가. 당신이라면 그럴 수 있겠는가. 하루, 아니 몇 시간만 감기몸살을 앓아도 괴로운 법인데 하루종일, 매일매일 계속되는 육체적 고통 속에서 긍정과 행복을 생각할 수 있겠는가. 나보다 더 상황이 안 좋은 사람들과 비교하며 그래도 나는 행복한 거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지금 나한테는 내 상황이 가장 힘들다.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나에게 세상은, 지금 내가 겪고 있는 이 세상이 내 세상의 전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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