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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골책방 Mar 05. 2024

최고의 순간, 암환자가 되다.

암 생존자

30대 중반 무렵, 다니던 직장이 매각 절차를 밟으면서 조직이 와해되어 갔고, 그렇게 나도 직장을 그만두게 되었다. 직장을 그만둔 후 부동산을 창업할 목적으로 공인중개사 자격증을 취득했지만 불안정한 시장 상황에 창업을 하는 것이 망설여졌다. 삼십 대 중반이라는 애매한 나이에 실직을 하게 된 나는, 점점 미래에 대한 불안감에 휩싸여 갔다. 공인중개사 자격증 공부를 하면서 아르바이트로 보험 텔레마케터 일을 잠깐 했었는데 의외의 높은 성과로 많은 돈을 벌었던 경험이 있었던 터라 부동산 창업의 꿈이 무산되고 나서는 보험텔레마케터 일을 몇 년간 더 해보기도 했다. 하지만 요즘 세상에 전화로 보험을 가입시킨다는 것이 쉽지만은 않았다. 계약을 한 건도 못 한 날은 피가 마르고 눈물이 날 정도로 괴로웠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서 내 나이는 어느덧 마흔에 가까워지고 있었고 결국 나는 극심한 스트레스로 보험 텔레마케터 일도 그만두게 되었다. 더 이상 할 수 있는 일이 없었고 나의 불안감은 극에 달하기 시작했다. 뭐 하나 내 뜻대로 되는 게 없었던 삶이었지만 이런 상황은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결국 안정적인 삶을 위해 공무원 시험에 도전을 하게 되었다. 마음이 급했다. 이미 마흔을 앞두고 있는 나이었기 때문에 공부하는데 너무 긴 시간을 할애할 수 없었다. 단기합격을 목표로 공부했고 벼랑 끝에 선 기분으로 공부에 매진했다. 너무 절박한 마음으로 공부를 한 탓이었을까? 공부를 시작한 지 2-3개월이 지났을 무렵, 몸에 이상반응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주된 증상은 앉아있기도 힘들 만큼 온몸에 기운이 빠지는 증상이었다. 온몸의 기운이 손끝과 발끝으로 전부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공부를 해야 했지만 책상에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그때부터 나는 누운 채로 독서 거치대를 겨드랑이에 끼우고 겨우 책장을 넘겨가며 힘겹게 공부를 이어나갔다. 몸의 이상 반응들은 점점 더 다양하게 나타났다. 월경이 불규칙해졌고, 부딪힌 적도 없는데 다리에 시커멓게 멍이 들어 병원을 갔더니 지방흡입술을 했냐면서 지방괴사가 일어났다고 했다. 아침에 일어나면 손가락 뼈가 뻣뻣하게 굳어서 주먹을 쥐기도 힘들어졌고, 놀란 마음에 류마티스 검사도 해봤지만 이상이 없었다. 공부하는 동안 소득이 없었기 때문에 지출을 줄이고자 최대한 돈을 아껴 썼는데 영양이 부족했나 싶어서 음식을 잘 챙겨 먹어도 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한 번도 행복했던 적이 없었던 삶이었다. 유학파 출신, 명문대 출신의 고 스펙자들이 넘쳐나는 직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소처럼 열심히 일하는 것뿐이었다. 한 달에 절반 이상은 밤 10시까지 근무를 해야 할 정도로 업무강도가 높았고 왕복 4시간 거리의 직장에 출퇴근을 하면서 늘 피곤에 찌들어 살았다. 서른이 넘어서면서부터는 체력의 한계를 느끼기 시작해서 출퇴근 시간을 줄여보고자 직장이 있는 강남 근처에 전셋집을 구하려 다녔는데 그동안 내가 모아놓은 돈으로는 제대로 된 전셋집을 얻기에 턱없이 부족했다. 빨래 건조대를 놓으면 거실이 꽉 찰 정도의 작은 전세방을 겨우 얻었고 주말에 하루 종일 방에 있을 때면 이따금씩 감옥 안에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학력이 중시되는 사회에서 좋은 대학을 졸업하지 못한 나는 대부분 계약직으로 여러 회사를 전전했고 정규직 직원들과 같은 업무를 하면서도 낮은 급여를 받아야 했다. 계약기간이 끝나고 나면 또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야만 했는데, 근무하면서 적게나마 모아놓은 돈은 다른 회사로 이직하기 전 공백기를 보내면서 순식간에 사라졌다. 경제적 궁핍은 늘 따라다녔고 삶이 불안정하게 느껴졌다. 그래도 공무원 시험에 합격을 한다면 직업적 안정은 이루게 될 테니 앞으로는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 것만 같았고, 그렇게 되리라 다짐했었다. 시간이 갈수록 건강은 점점 더 악화되어 갔지만 시험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이었기 때문에 병원은 시험이 끝나면 가보리라 생각하고 공부에만 집중을 하기로 했다. 어머니를 따라 일 년에 2-3번씩은 절에 갔지만 사실상 자발적인 종교 활동은 하지 않고 있었으므로 나는 종교인이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시험이 있던 날 아침에는 무릎을 꿇고 기도를 드렸다. 눈물이 흘러내렸다. 다른 건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 이번 한 번만 도와달라고 울며불며 매달렸다. 시험은 역대급의 난이도로 출제되었다. 그동안 기출문제나 모의고사를 통해서 많은 훈련을 했지만 그동안 본 적 없는 난이도의 문제들이었다. 이런 문제들이라면 나뿐만 아니라 모두가 당황하고 있을 거라는 생각으로 평정심을 유지했어야 했는데 시험을 보는 순간에는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고 모든 게 다 끝났다고, 다 틀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내 심장소리가 귓가에 크게 울려 퍼질 정도로 이성을 잃었고 마인드 컨트롤이 전혀 되지 않았다. 시험 종료 시간이 다가오자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남은 문제들을 모조리 찍었고 그렇게 난 시험장을 나왔다. 시험이 끝나고 집에 돌아와서 아이처럼 엉엉 울음을 터트렸다. 그렇게 한참을 울다 저녁 무렵 공무원 준비생들이 모인 인터넷 카페에 들어갔다. 과목당 1-2문제, 많으면 2-3문제 정도만 틀려야 합격권에 들 수 있는 것이 공무원 시험인데 카페에 올라온 글들을 보니 과락을 맞은 수험생들이 수두룩했다. 말도 안 되는 난이도의 문제를 비판하는 강사들의 영상들이 올라왔고, 기사에까지 보도되었다. 합격선을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 이 정도의 상황이라면 합격권에 들 수도 있겠다’ 하는 실낱같은 희망을 가지고 결과를 기다렸다. 그렇게 일주일쯤 흘렀을 것이다. 예정되어 있던 유방암 정기검진을 하던 중 특정부위에 혈액이 모이는 것이 관찰되었고 이런 경우 30%의 확률로 암일 가능성이 있다고 하여 조직검사를 진행하게 되었다. 조직검사까지 진행하게 된 것에 순간적으로 불안한 마음이 올라왔지만 암이 아닐 확률이 더 높으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는 선생님의 말씀에 차분한 마음으로 결과를 기다리기로 했다. 그렇게 조직검사를 마치고 하루, 이틀 정도 지났을 무렵, 시험이 끝나서인지 몸에 기운이 좀 돌아오는 느낌이 들어 미용실에서 머리를 하고 집으로 돌아오던 중 병원에서 문자 한 통을 받았다. 추가적인 조직검사를 진행한다는 문자였고 휴대폰을 쥐고 있던 손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걱정스러운 마음에 병원에 전화를 걸었지만, 간호사는 추가 조직검사를 한다고 해서 다 암은 아니라며 걱정하지 말라고 나를 안심시켰다.


누가 긍정의 힘을 말했던가. 20대 중반 무렵, 그 당시 베스트셀러였던 ‘시크릿’이라는 책을 읽었었다. 그 책의 저자는 ‘끌어당김의 법칙’을 말한다. 부정적인 생각을 많이 하면 할수록 부정적인 것들을 끌어당기고, 긍정적인 생각을 많이 하면 할수록 긍정적인 것들을 끌어당긴다는 것이었다. 긍정적인 주파수에 몸과 마음을 맡기면 온 우주의 기운이 그렇게 되도록 힘이 모인다고 했다. 책을 읽었던 그 당시에도 책의 내용에 전혀 공감을 하지 못했던 기억이 있다. 왜냐하면 최소한 나에게는, 내 삶에 있어서는 긍정의 힘은 전혀 발휘되지 못했고 오히려 그 반대인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나에게 징크스와도 같았다. 어떤 좋은 일이 90% 이상의 높은 확률로 실현될 것이 거의 확정된 경우에도 그 일이 실현될 것을 미리 상상하며 기뻐하거나 마음을 놓고 있는 순간, 삶은 마치 나를 조롱하고 뒤통수라도 후려치듯 실현될 것이 확실했던 그 일은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무산이 돼버리고 말았다. 이런 일은 어린 시절부터 내 인생에서 징크스처럼 반복되었고 그로 인해 나는 아무리 높은 확률로 예정된 좋은 일이 있더라도 절대 그 일에 대해서 미리 상상하며 기뻐하거나 입밖에 내뱉지 않게 되었다. 정말 희한한 건, 끌어당김의 법칙이 내 인생에서는 반대로 작용한다는 것인데 오히려 어떤 불행한 일이 일어날까 노심초사하고 마음을 졸이고 오랜 시간 동안 그 일에 대한 걱정을 하면서 괴로워하면 이상하게도 염려했던 그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그것은 마치, 내가 삶에서 겪어야 할 불행의 양이 정해져 있는데 내가 마음을 졸이고 괴로워하는 동안 그 불행의 양이 상쇄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30%의 확률로 암일 수도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 잠깐 불안한 마음이 들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나는 70%의 암이 아닐 확률에 더 마음을 기울였다. 추가 조직검사를 한다는 문자를 받고 또 한 번 잠깐 무서운 마음이 들었지만 간호사의 말에 이내 맘을 놓았고 나는 공무원 수험생들이 모인 카페를 드나들며 수험생들의 시험 후기 글들을 읽으며 점점 높아지고 있는 듯한 합격의 가능성을 점치며 즐거운 상상에 빠져있었다. 하지만 긍정적인 생각을 하면 온 우주의 에너지가 나를 돕는다는 그 말은 여전히 나에게는 적용되지 않았고 나의 긍정적인 생각은 오히려 우주의 음기를 불러들이는 듯했다. 역시나 나는 내 삶의 징크스를 벗어나지 못했고, 늘 그래왔듯 삶은 나에게 가혹했다.


                                                         지나온 길을 돌아보니

                                                     내가 이 삶을 이끌어 온 건지

                                            폭풍처럼 휘몰아치는 삶 속에서 멱살 잡혀

                                             이리저리 이끌리다 여기까지 온 건지,

                                                   가진 것도 이뤄낸 것도 없이

                                           발자국조차 남기지 못한 지나온 길을 돌아보며

                                                      공허한 마음에 한숨짓는다.


시험공부를 하는 동안에도 종종 합격 통보를 받는 그날을 상상했었다. 합격 통보를 받고 기뻐하는 나와 부모님의 모습을 얼마나 많이 상상해 왔는지 모른다. 얼마나 기다렸던 날이었던가! 나는 양쪽 가슴을 다 잘라낸 채로 병상에 누워 공무원 필기시험에 합격했다는 문자 통보를 받았다. 그렇게 나는 암환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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