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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풍

암 생존자

by 시골책방

불행 중 다행히도, 주사 항암치료 여부를 결정짓는 검사 결과에서, 항암치료를 받았을 때와 받지 않았을 때 재발률의 차이가 크지 않다는 사실이 확인되면서, 나는 주사 항암치료를 면제받게 되었다. 추가로 암 타입을 확인하는 검사에서도 결과가 좋게 나왔다. 검사 결과를 들으러 병원에 갔던 날, 진료실 앞에서 얼마나 바들바들 떨며 결과를 기다렸는지 아직도 그때의 힘들었던 감정이 고스란히 떠오른다. 그리고 검사 결과가 좋게 나왔다며 나보다 더 기뻐하며 검사 결과를 말씀해 주시던 의사 선생님의 표정도 생생하게 떠오른다. 나는 향후 10년간 여성호르몬을 차단하는 경구용 항암제 ‘타목시펜’을 복용하라는 처방을 받았다. 이 약은 호르몬을 억제하는 특성 때문에, 갱년기 여성에게 흔히 나타나는 여러 부작용이 나타날 수 있다는 설명도 함께 들었다. 사실 나는 유방암 진단을 받기 1-2년 전부터 유방에 다수의 물혹과 미세석회로 인해 내가 사는 지역의 대학병원에서 6개월에 한 번씩 정기적으로 유방암 정밀검진을 받고 있었다. 유방암 진단을 받기 1년 전쯤부터는 가슴에 딱딱한 혹이 만져지기도 해서 불안한 마음에 여러차례 조직 검사를 요청해 봤지만, 그때마다 의사 선생님은 초음파상 모양이 나쁘지 않으니 좀 더 지켜보자는 말씀만 하실 뿐이었다. 암 진단을 받은 뒤에는, 그때 조직 검사를 했다면 더 일찍 발견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원망이 순간 스치기도 했다. 하지만 유방암은 오진이 잦고 진단이 까다롭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기 때문에, 이 또한 내 운명이라고 받아들이며 그런 감정을 의사 선생님께 드러내지는 않았다. 그런데 암 진단 소식을 들은 주변인들이 다른 병원 진료도 받아볼 것을 권하는 말에 나는 의사 선생님의 기분이 상하지 않도록 주변인들 핑계를 대며 조심스럽게 다른 병원 진료를 위한 서류를 요청하게 되었는데, 평소 이웃집 언니처럼 살갑게 굴던 의사 선생님의 안색이 갑자기 차갑게 돌변하더니 다른 병원 의사가 자신보다 실력이 더 좋냐며 따져 물었다. 나중에 모든 치료를 마치고 우연한 기회에 꽤 명망 있는 유방외과 선생님을 만나 뵙게 되었는데 내 조직 검사 결과지 등을 확인하시고는 암타입이 공격적인 타입이 아니기도 하고 여러모로 봤을 때 진작에 조직 검사를 했더라면 이렇게까지 되지는 않았을 거란 말씀을 하셨다. 나중에 다른 환자들을 통해 알게 된 사실은, 내가 정기검진을 받고 있던 그 대학병원의 여의사가 환자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고, 환자를 오로지 실적으로만 생각하는 것으로 악명이 높아 환자들이 그 의사에게 치료받기를 꺼려했다는 것이었다. 퇴원을 하고 난 뒤에도 내가 왜 이런 몹쓸 병에 걸리게 된 것인지 많은 생각에 잠겼다. 정기검진을 받던 대학병원의 의사 선생님이 떠오를 때면 울분이 치솟기도 했고 미래에 대한 끝없는 불안과 스트레스가 호르몬 불균형을 일으켜 병을 키운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리고 야근과 회식에 찌들어 살아왔던 과거의 나를 돌아보며 스스로를 자책하기도 했다.


어쨌든 주사 항암치료는 면제가 되었고 이제 약만 꾸준히 복용하면 되는 상황이었지만, 나는 여전히 극심한 불안과 공포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유일하게 내 아픔을 진심으로 공감해 주는 사람들이 있는 곳이 환우들이 모인 온라인 커뮤니티였고, 몸에 사소한 증상이라도 나타나면 정보를 얻어야 했기에 하루에도 수십 번씩 그곳을 드나들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예후가 좋지 않은 환우들의 글을 반복적으로 접하게 되었고, 10년 동안 복용해야 하는 항암제의 부작용이 생각보다 훨씬 다양하고 무섭다는 사실까지 알게 되면서, 건강이 더 악화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은 점점 커져만 갔다. 결국 나는 부정적인 감정 속에 깊이 매몰되어 갔다. 나보다 1-2년 전에 유방암 진단을 받았던 지인은 같은 지역의 환우들끼리 오프라인 모임을 갖기도 했는데, 본인의 경험상 오프라인 모임은 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했다. 암 환우들은 6개월마다 진행되는 정기검진 결과에 따라 마치 수명 연장을 선고받는 듯한 심정이 들곤 하는데, 그 때문에 검진일이 다가올 때면 말 한마디 건네기조차 어려울 만큼 모두가 예민해진다고 했다. 게다가 모임에 있는 환우 중 단 한 사람이라도 좋지 않은 상황을 맞게 되면 모두가 절망에 빠지기도 한다는 것이었다. 어떤 오프라인 모임에서는 한 환우가 정기검진에서 재발 판정을 받은 후 자살을 한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암 진단을 받은 직후부터 치료를 마치고 한참이 지날 때까지, 나는 다양한 감정의 변화를 겪었다. 공포감이 극에 달했을 때는 마치 죽음이 코앞에 다가온 듯한 생각이 들었고, 어차피 죽을 몸이라는 생각에 내 입으로 들어가는 음식조차 아깝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러다가 어느 날은 한 치 앞도 모르는 인생이니 남은 삶은 하고 싶은 것을 맘껏 하고 살아야겠다는 생각에 평소 같으면 사지도 않았을 것들을 미친 듯이 쇼핑 하기도 했다. 그야말로 나는 상상에 미쳐갔다. 언제까지 이렇게 살 수는 없지 않냐고, 제발 정신 차리자고 수없이 되뇌어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 와중에 공무원 시험의 면접까지 준비해야 했으니 지금 생각해 보면 내가 무슨 정신으로 그 시간을 지나왔는지 모르겠다.


면접 스터디를 위해 몇몇 사람들과 모임을 가졌는데, 에코백에 작은 연습장 하나만 넣고 다녔음에도 팔과 어깨에 심한 통증이 왔다.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면접 때 입을 의상을 구입하고, 예상 질문에 대한 답을 달달 외우며 준비했으니, 지금 생각해 보면 인간은 생각보다 강인한 존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제정신이 아닌 상태로 면접을 마치고 최종 합격 통보를 받은 뒤 발령을 기다리는 동안에도, 나는 여전히 불안감 속에서 매일 힘겨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원래 다리에 있던 점에서 간지러운 느낌이 들어 무심코 긁었는데 각질이 일고 피가 조금 비쳐 나왔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대학병원 피부과를 찾았고, 결국 조직검사까지 진행하게 되었다. 그런데 검사 결과, 시간이 지나면 암으로 발전할 수 있는 병변이라는 진단을 받았고, 그 말에 따라 갑작스럽게 수술까지 받게되었다. 그 일은 내 불안감에 더욱 기름을 붓는 사건이 되었고, 그 이후로 나는 모든 감각에 지나치게 예민해졌다. 그래서 몸에 조금이라도 이상한 반응이 나타나면 기절할 듯이 놀라 유방암 수술을 집도해 주셨던 선생님을 찾아가기를 여러 번 반복했다. 유방외과 선생님은 그런 나를 몹시 걱정하시며 정신과 상담을 받아보기를 여러 차례 권유하셨고, 결국 같은 병원의 정신과 협진까지 요청해 주셨다. 그러나 나는 정신과 약에 의존하게 된 아버지의 모습을 가까이에서 지켜본 탓에, 신경안정제를 처방받고도 거의 복용하지 못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 무렵 항암제 부작용이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체온조절이 되지 않아 한 시간에도 수차례 추웠다, 더웠다를 반복했다. 그 정도가 상상을 초월했는데, 추울 때는 뼈가 시릴 정도의 추위가 느껴졌고 열이 오를 때는 온몸이 불에 타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항암제 후유증은 환자마다 정도가 다른데 특별한 부작용 없이 잘 복용하는 환자가 있는가 하면, 극심한 부작용으로 복용을 중단하는 환자들도 있었다. 나 또한 부작용이 심한 편에 속했는데 열이 오를 때면 온몸이 땀으로 범벅이 되었고 자다가 이불을 들어 올리면 이불에 맺혀있던 땀이 비처럼 쏟아질 정도였다. 정신과 치료에 대한 거부감 때문에 오로지 내 의지로만 버텨내려니,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다른 환우들은 지금이 가장 힘든 시기라며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거라고 말했지만, 도무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사랑하는 연인과의 이별로 겪는 실연의 아픔도 아닌데, 이 감정이 시간이 흐른다고 해서 나아질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고, 마음이 편안할 때는 어떤 느낌이었는지조차 기억나지 않았다.


그렇게 반쯤 정신이 나간 채로 하루하루를 버티던 중, 우연히 직장암 말기 판정을 받은 한 여성 환우의 SNS를 접하게 되었다. SNS 활동을 하는 암 환우들은 많았지만, 내가 유독 그녀의 계정을 꾸준히 들여다보게 된 이유는 힘든 상황 속에서 억지로 긍정적인 태도를 보이려 애쓰는 것이 아니라 남은 삶을 진정으로 즐기며 매 순간을 살아가는 그녀의 모습이 내게는 상상조차 어려울 만큼 신기하고 특별하게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밝은 정도가 아니라 매사에 코믹하기까지 했다. 나는 거의 매일 그녀의 SNS을 보았다. 대략 내 나이 또래로 보이는 그녀는 세 아이의 엄마였는데, 세 명의 아이를 두고 떠날 수도 있는 상황에 어떻게 그렇게 진정으로 밝을 수 있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오랜 시간 동안 그녀의 SNS를 들여다보던 나는 결국 용기를 내어 그녀에게 쪽지를 보내게 되었다. 타고난 천성의 문제도 있겠지만 무언가 마음을 다스리는 방법이 있다면 배우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었다. 나는 그녀에게 예의를 갖추어 조심스럽게 내 상황과 현재의 감정 상태를 설명했고 그녀에게 마음을 다스리는 방법이 있다면 배우고 싶다는 말을 했다. 아래는 지금은 고인이 돼버린, 그녀와 나눈 대화 내용의 일부이다.


안녕하세요~저는 올해 마흔 살 미혼 여성입니다. 몇 달 전 유방암 2기 진단을 받고 양쪽 가슴을

전절제하는 수술을 받았습니다. ‘맘마프린트’라는 검사를 통해 다행히 주사 항암치료는 면했지만 암 진단의 충격이 너무 감당하기가 힘들었고 유방암은 5년 이후에도 재발이나 전이가 많다 하여 매일매일을 불안과 공포 속에 살고 있습니다. 정보를 얻기 위해 가입한 환우들의 커뮤니티에는 재발이나 전이가 된 환자들의 글들이 넘쳐나다 보니 불안감이 더 커지게 되어 요즘은 커뮤니티에 들어가는 횟수도 많이 줄여나가고 있는데 이미 극도의 공포감에 잠식이 되어 하루하루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저와는 다르게 투병 중에도 매우 밝고 명랑하게 지내시는 모습을 보면서 문득 궁금해졌습니다. 어떻게 이렇게까지 명랑하실 수 있는 건지, 천성일 수도 있겠지만 마음을 다스리는 어떤 노하우가 있다면 저도 좀 배워보고 싶은 마음에 이렇게 용기 내어 메시지를 보냅니다. 저도 입문한 지 얼마 안 된 초보이긴 하지만 요즘 불교철학을 배우며 스님들께서 집필하신 서적들도 많이 읽고 마음을 다스리려고 노력을 하고 있는데 쉽지가 않습니다. 언제까지 이렇게 불안감을 안고 살아야 할까’, ‘정신을 차리자’고 머리로는 수없이 되뇌어도 마음은 안정이 잘 안되네요. 마음 편히 살 수 있는 날이 올 수 있긴 한 건지, 평생 이런 마음으로 살아가게 될까 봐 두렵습니다. 실례가 안 된다면 어떻게 마음을 다스리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실례가 되었다면 정말 죄송합니다.


불교에 입문하셨다니 절하는 게 힘드시면 경전이라도 읽으며 마음을 다스려보세요.

불교는 기독교처럼 부처님을 믿.는.게. 아니고 본인이 수행을 통해 부처가 되는 것을 기본 교리로 삼고 있습니다. 원하는 기도, 바라는 기도가 아닌, 부처가 되는 수행을 시작한다고 생각하시고 한번 공부를 해보세요. 저는 진단 초기부터 직장암 4기로 수술조차 안된다고 했었어요. 어려서부터 부모님과 친구들한테 일방적인 사랑받으며 자라왔고 배우자와 아이들한테도 많은 사랑을 받으며 살아왔습니다. 종교관이 확실한 데다 갖고 싶은 것 다 가져봤고 인생에 시련이 없었기에 사실 진단받았을 때 처음부터 저는,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생각했어요. 나는 지금 죽어 삼도천 건너도 부처 흉내라도 내며 살았으니 극락은 못 가더라도 최소 이생보단 좋은 몸을 받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했고 더 살아봐야 이 생에 업. 밖.에. 쌓을 것이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주변 사람들이 살리더라고요. 동생이 10년 번 돈을 통장째로 갖다주며 그러더라고요. 미국을 가든 일본을 가든 어떻게든 해보라고요. 누나 만나러 오는 길에 제2 롯데월드도 있었고 3억짜리 람보르기니도 지나갔는데 속으로 생각을 해봤대요. 저걸 주면 우리 누나랑 바꿀까. 저걸 주면 우리 누나랑 바꿀까. 그런데 안 되겠더래요. 어떤 모습이어도 좋으니 그냥 우리 곁에 있어달라고. 그 말에 그냥 내가 괴로워도 치료가 아무리 힘들어도 살아야겠더라고요. 저는 부정적인 이야기를 듣기 싫어서 커뮤니티에는 가입하지 않았지만, 주변 사람들이 저보다 공부도 많이 하고, 친구들이 커뮤니티에 가입해 공부하며 부정적인 이야기는 걸러내고 긍정적인 얘기만 전해 주었습니다. 항암 전날에는 꼭 간단한 운동도 함께 해주며 저녁도 같이 먹어 주었어요. 수술하고 누워있으면 남편 쉴 수 있게 돌아가며 간병도 해주고요. 너무 집에 혼자 있으면서 괴로워하지 마시고 운전 가능하시면 나를 좋아해 주는 사람들과 가능한 행복한 시간을 보내시면 좋을 것 같아요. 혼자 내려앉는 시간엔 경전이라도 읽고 명상이라도 하고요. 저는 생각이 생각을 후벼 파는 시간을 없애버렸습니다.


이렇게까지 정성스럽게 답장을 해주시다니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한 자 한 자 마음속에 깊이 새기려고 하루 종일 읽고 또 읽었습니다. 여러 번 반복적으로 읽으면서 많은 생각이 들었는데 님께서는 굉장히 단단한 분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불심이 깊고 마음 수행이 정말 잘되어 있으신 분 같았고요. 여러모로 저는 많이 부족한 사람인 것 같습니다. 저는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여태껏 단 하루도 쉬웠던 날이 없었던 것 같아요. 가진 게 너무 없다 보니 두고 가기 아까울 것도 없고 하루하루 사는 게 너무 버거워 아침에 눈을 뜨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 날들도 많았습니다. 그런데 막상 암 진단을 받고 나니 왜 이렇게 두려운지, 무엇이 저를 이렇게 불안에 떨게 하는지 깊이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죽음 자체에 대한 두려움보다는 저에게 주어진 복이라곤 딱 하나, 너무 좋으신 부모님이 계신데 제가 끝까지 부모님을 보살펴 드리지 못하고 먼저 떠나는 불효를 저지르게 될까 봐 걱정되는 마음과,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이 많이 고통스러울까 봐 두려운 것 같아요. 행복한 삶을 살고 가진 게 많은 사람일수록 삶에 미련이 많을 거라 생각했는데 오히려 행복하게 살았으니 여한이 없다고 생각하셨다는 말씀에, 저와는 생각의 관점이 다르고 그릇의 크기 자체가 다른 분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리도 나약한 저는 얼마나 많은 수행을 해야만 님과 같은 대담함을 가질 수 있게 될지 모르겠네요. 오늘 수없이 반복해서 읽고 또 읽으며 결론을 내린 건, 님의 조언대로 수행을 시작한다는 마음으로 공부를 해보려고 합니다. 불심이 깊은 엄마를 따라서 절에 몇 번 따라가 보고 아프고 나서는 일주일에 한 번씩 절에 다니고 있지만 모르는 게 너무 많아서 오늘 조계사에 불교 입문반 수강 신청도 했습니다. 진심이 담긴 답장 다시 한번 너무너무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저는 커뮤니티 활동을 많이 했었기 때문에 많은 분들의 사연을 접했는데, 4기 환우분들 중에도 마음이 단단하고 굳은 의지를 가지신 분들은 결국 이겨내시더라고요. 님께서는 워낙 단단한 마음과 긍정이 있으시니 완쾌하실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강하게 드네요. 치료 잘 받으셔서 꼭 완쾌하시길 바라겠습니다. 정말 감사했습니다.


나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던 그녀는,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도 그녀는 병마로 인한 극심한 육체적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으로는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늘 명랑했다. 호스피스에 입원을 하게 되면서 남겼던 단 하나의 글에서만 그간의 고통이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세상을 떠나기 하루 전 “이번 소풍은 정말 즐거웠어요”라는 글을 남긴 채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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