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시골책방 Mar 09. 2024

불안 속 새로운 시작

공직생활

나는 공무원시험 최종 합격자 발표 후 근무지에 발령이 나기 전까지 조계사에서 불교입문반 강의를 듣고 다양한 책들을 읽으며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부단히 노력을 했다. 시간이 가면 갈수록 항암제 부작용으로 다양한 증상들이 나타났고 증상의 강도가 점점 세졌는데 체온조절이 안 되는 것은 물론, 아침에 일어나면 주먹을 쥐기가 힘들 만큼 모든 관절이 뻣뻣해졌고 침대 밖으로 발을 내딛으면 발바닥에 강한 통증이 밀려올 정도로 관절통이 심했다. 조금이라도 무리를 하거나 스트레스를 받으면 금세 겨드랑이가 부어올랐고 시야가 흐려져 책을 읽기도 어려워졌으며 평소 지나치게 좋은 기억력 때문에 친구들 사이에서 ‘미친 기억력’으로 불리던 나는 심한 건망증으로 일상생활을 하는 중에도 무언가를 자꾸 잊어버리기 일쑤였다. 머리를 감으면 머리카락이 한 움큼씩 빠졌고 잡티 하나 없던 얼굴에는 기미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온몸에는 이상한 붉은 점들이 생겨났고 극심한 불면증으로 날밤을 새는 날이 많았다. 살면서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고통이었다. 흔히들 잠을 잘 자는 사람을 말할 때 '머리만 닿으면 잔다'라는 표현을 한다. 나는 그보다 더한 사람이었다. 머리까지 닿을 필요도 없었고, 엉덩이만 닿으면 잠이 드는 탓에 버스나 지하철은 나에겐 항상 수면의 공간이었다. 그런 나였기에 내가 이렇게 극심한 불면증을 겪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지독한 불면증으로 긴 시간을 뒤척이며 괴로워하다가 수면제 한알을 겨우 털어 넣고 나서야 잠이 드는 날이 많았다. 여러 가지 부작용 중 나를 가장 힘들게 했던 건 시도 때도 없이 오르는 열감과 안면홍조 증상이었는데 열이 오를 때면 “덥다” 의 느낌 정도가 아니라 “뜨겁다”의 느낌이었다. 열이 오를 때면 내장 깊숙한 곳에서부터 불구덩이가 올라오는 것 같았고 온몸이 불에 타는 듯한 뜨거운 느낌이 들면서 순식간에 몸 전체가 땀범벅이 되었는데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엄청난 고통이었다. 게다가 갑작스러운 코로나 상황으로 착용하게 된 마스크로 인해 열감이 오를 때는 마스크 안이 한증막처럼 답답하게 느껴졌고 숨을 쉬기가 힘들었다. 그러다 보니 계절을 불문하고 손선풍기를 휴대하는 것이 필수였는데 여름철에는 손선풍기를 들고 다니는 것이 이상할 게 없지만, 겨울철 한파에 손선풍기를 들고 있는 내 모습은 다른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고 그 모습이 꽤나 괴이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또한 유방암 수술로 인한 후유증으로 컴퓨터 사용 시 마우스 작동을 하는 동작만으로도 팔의 심한 저림이 오는 날도 있었다. 하지만 육체적 고통보다 더 힘든 것은 정신적 고통이었다. 암투병 중이었던 친구의 남편은 상태가 더 나빠졌고, 엄마와 내가 돌보고 있던 외삼촌 역시 암으로 투병 중이셨는데 임종이 멀지 않은 듯했다. 이런 주변 상황들까지 더해져 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 좀처럼 쉽지 않았다. 하루하루 살아내는 것이 버겁고 힘들게만 느껴졌다. 그러던 중에 근무지로 발령이 나게 되어 나는 불안감을 안은 채로 공직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근무지가 정해지기 전에 미리 나의 상황을 알리고 업무가 좀 수월한 곳으로 발령을 요청드리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신규 임용자의 그런 행동이 자칫 건방진 모습으로 비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고 미리 말씀을 드렸다가 임용유예가 되는 상황이 올까 봐 두려운 마음도 있었다. 몸도 마음도 힘든 상황이긴 했지만 근무를 시작하면 일에 몰두하게 되어 오히려 여러모로 건강이 더 나아질 수도 있을 거라는 기대감이 있었고 경제적인 문제도 있었기 때문에 빨리 근무를 시작하고 싶었다. 공교롭게도 유방암 정기검진 일정이 있는 달에 발령이 나게 되어 부득이 근무를 시작한 지 한 달도 되지 않은 시점에 휴가를 사용해야 하니 그때 내 사정을 말씀드려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미리 내 상황을 알리지 않은 행동이 불러올 파장에 대해 알게 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공무원으로서 첫 출근을 하던 날 임용식을 가졌는데 이제와 생각해 보니 공무원이 된 것에 대한 뿌듯함을 느꼈던 건 임명장을 받고 선서를 했던, 짧았던 그 순간뿐이었던 것 같다. 나는 임용식을 마치고 바로 근무지로 갔는데 앞으로 같이 근무하게 될 직원들과의 인사나 소개 절차도 없이 내가 근무지에 도착하자마자 상급자분께서는 “미안하지만, 인사할 시간이 없으니 바로 휴게실에 가방을 놓고 나오세요”라는 말씀을 하셨고, 그렇게 나는 제대로 된 실무교육도 없이 바로 창구에 앉아 응대를 시작하게 되었다. 15년 이상의 사회생활동안 이런 경우는 겪어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었다. 그동안의 사회생활에서는 보통 입사를 하면 실무교육을 하는 담당자가 일정 기간 동안 신입사원들을 모아놓고 실무에 대한 교육을 하고, 실무에 투입이 되어서도 나와 동일한 업무를 하고 있는 또는 전임자였던 선배들을 통해 업무에 대한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실무 교육을 하는 담당자가 따로 없는 경우에는 선배한테 1:1 코칭을 받게 되는데 한동안은 선배 옆에 의자를 두고 앉아서 선배가 하는 모든 업무를 지켜보며 메모를 하고 운이 좋게 인심 좋은 선배를 만난 경우에는 본인이 업무를 배울 때 작성해 두었던 매뉴얼을 카피해서 준다거나 내가 메모하는 번거로움을 줄여주기 위해 사용하는 전산화면을 카피해서 업무 순서대로 번호를 매겨 주기도 했다. 업무난이도에 따라 사수 옆에 앉아서 업무를 배우는 기간은 다소 차이가 있지만, 그렇게 일정기간 사수 옆에서 업무방식을 어느 정도 익히고 나면 실무에 투입된다. 실무에 투입되고 나서도 내가 업무에 완전히 익숙해지기 전까지는 내가 처리한 업무들을 사수가 검토를 해주고 막히는 부분이 있으면 도움을 준다. 사수의 성향에 따라서 가르쳐주는 태도에서 친절도의 차이가 있기도 하고, 가르쳐주는 내용의 상세함이 다른 경우는 있다. 단순히 필요한 업무지식만 가르쳐주는 사수가 있는가 하면 자신이 업무를 하면서 습득한 노하우까지 전수를 해주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불친절한 사수라고 해서 이런 교육과정들이 생략되지는 않는다. 신입사원에 대한 교육은 선배직원의 선택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런 과정이 회사의 프로세스의 하나로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아무리 베테랑의 직원이라도 언제든 실수는 일어날 수 있기 때문에 실수로 인해 금전적인 손실이 있을 수 있는 업무를 담당하고 있는 경우에는 제아무리 내로라하는 능력자라도 다른 직원과 크로스체킹을 하는 과정이 있다. 이것은 단순히 상급자가 부하직원이 처리한 서류들을 대충 훑어보고 결재란에 서명을 하는 것과는 다른 깊이다. 한동안은 선배 옆에 앉아서 일을 배우게 될 거라는 내 생각과는 다르게 실무에 대해 아는 것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근무지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실무에 투입되어야 하는 상황에 나는 적잖이 당황을 했다.


그렇게 근무를 시작한 첫날, 강도 높은 업무에 나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고 내가 근무하는 곳이 해당 지역에서는 가장 바쁘고 전국에서도 업무강도가 높기로 순위권 안에 드는 곳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필 왜... 왜 또 나한테. 그래. 이게, 이런 게 내 삶이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늘 그랬다. 사회생활 내내 징크스처럼 내가 속해 있는 부서는 늘 직장에서 업무량이 가장 많은 부서였고, 좀 한가한 부서로 이동을 하면 한가했던 부서가 갑작스럽게 바빠지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이런 나를 보고 “일복이 많다”라고 하던데 이런 일에도 ‘복’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게 맞는지 모르겠다. 내가 맡은 업무 중에는 물품을 옮겨야 하는 일도 있었는데 물품의 무게가 생각보다 많이 무거웠고 수술한 팔로 무거운 것을 들었다가 심각한 후유증을 겪을 수도 있었기에 내 상태를 알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나는 출근한 첫날부터 암환자라는 것을 밝히는 것이 어렵게 느껴져서 암환자라는 사실을 밝히지 않고 팔을 수술해서 무거운 것을 들 수가 없는 상황이라고 말을 했으나 어떤 수술을 했는지, 어떤 상태인지를 집요하게 묻는 상급자로 인해 본의 아니게 출근 첫날부터 암환자라는 사실을 밝힐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로 인해 나는 인사담당자가 속해있던 부서의 상급자에게 “왜 그런 상황을 미리 얘기하지 않았냐”며 날카롭게 따져 묻는 전화를 받게 되었고 서러운 마음에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강도 높은 업무에 육체적 피로감이 심했고 항암제 부작용으로 생긴 건망증에 불안한 마음까지 더해져 일을 하는 과정에서 집중을 잘하지 못하고 실수가 잦았다. 계속되는 실수에 자존감은 떨어질 대로 떨어졌고 절망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퇴근을 하고 집에 와서는 너무 힘든 마음에 어린아이처럼 엉엉 울기도 했다.


그런데 내가 근무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 선배 직원과 대화를 나누던 중 유방암을 진단받게 된 과정에 대한 얘기를 나누게 되었는데 내 얘기를 듣던 선배 직원은 “어? 나도 가슴에 딱딱하게 만져지는 게 있는데?”라는 말을 하였고 나는 그분께 얼른 병원에 가보라는 조언을 했다. 그리고 그다음 주 월요일에 나는, 갑작스럽게 출근을 하지 않은 그 선배가 주말에 병원을 갔다가 유방암 진단을 받았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고 그 길로 선배는 질병휴직에 들어가게 되었다. 자녀가 있는 분이었는데 진단이 늦었다면 어찌 됐을지, 초기에 발견하게 된 것이 너무 다행이라는 생각에 가슴을 쓸어내렸고 내가 이렇게 업무강도가 높은 곳으로 발령이 나게 된 것이 재수가 없었던 일이 아니라 굉장히 의미 있는 일이었단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지나고 시간이 지나면서 여전히 체력적으로 많이 힘들긴 했지만 처음보다는 몸도, 마음도 조금씩  적응이 되어가는 느낌이 들었고 그제야 조금씩 보이지 않던 세상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나는 30년이 된 저층 아파트에 전세로 살고 있었는데 아파트 단지의 조경이 너무 예뻐 수목원인지 아파트 단지인지 헷갈릴 정도였다. 엘리베이터도 없는 오래된 저층의 아파트이지만 이곳에 살면 동화 속에서 살고 있는 기분이 들 것 같아 오래전부터 내가 살고 싶어 했던 아파트였다. 근무를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내가 꿈꾸던  아파트에서 살게 되었지만 하루하루 고단한 일상 속에 파묻혀 지내다 보니 아파트의 경관이 눈에 들어올 틈이 없었다. 근무를 시작한 지 몇 달이 지나고 나서야 어느 주말에, 창문을 두드리는 빗소리에 창문을 열어보고는 한참 동안 감격을 하며 서 있었던 모습이 생각이 난다. 주말이면 나는 음악을 틀어놓고 밀린 청소를 하기도 하고 욕조에 들어가 탕목욕을 즐겼는데 그럴 때면 한없이 마음이 편안하고 기분이 좋았다. 암 진단을 받기 전에도 느껴보지 못한 그런 기분이었다. 푸른 나뭇잎, 지저귀는 새소리, 흩날리는 꽃잎과 하늘의 경이로움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고 보니 어릴 적 나는 오후가 되면 항상 친구들과 땅바닥에 그림을 그려놓고 돌을 던지며 그 그림 위를 한발 또는 두 발로 뛰는 놀이를 했었다. 그 놀이의 명칭이 무엇이었는지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그렇게 한참을 놀다 보면 어느덧 하늘은 오렌지 빛과 붉은빛의 노을로 물들었는데 노을이 질 무렵이면 나는 모든 활동을 멈추고 마치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듯 한참을 가만히 서서 노을을 감상하곤 했다. 그렇게 어린 나는 매일을 같은 패턴으로 하늘의 경이로움을 바라봤었다. 나는 오랜만에 붉은빛으로 물든 하늘을 보면서 어린 시절의 나를 떠올렸다. 그동안 무엇을 이루고자 이 머리 위 경이로움을 잊고 살았던가. 나는 무엇을 위해 그렇게도 치열하게 살아왔던 것인가. 잊지 않으리라. 고개만 젖히면 느낄 수 있는 이 경이로움을! 내 눈에, 가슴에 차곡차곡 담고 살리라 그렇게 다짐을 했다.

이전 04화 소풍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