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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골책방 Mar 05. 2024

9시간의 수술, 고통의 시간들

암 생존자

처음 진단을 받았을 때는 두려움보다는 그저 얼떨떨한 마음뿐이었다. 의사 선생님께서는 정확한 건 정밀한 검사를 더 해보고 수술을 해봐야 알겠지만, 초기의 병변으로 추측되어 이런 경우는 주사항암치료는 면제가 되고 수술 후에 경구항암약을 처방받아 복용하면 되기 때문에 치료 과정이 훨씬 수월할 거라고 했다. 불행 중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떨리는 마음을 가다듬고 일단 유방암에 관한 정보를 얻고자 유방암 환우들이 모인 인터넷 카페에 가입을 했다. 카페의 글들을 통해 정확한 병기는 수술 후에나 알 수 있다는 것과, 초기로 예상되었던 환자가 수술을 받고 난 후 병기가 바뀌는 경우가 종종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카페에는 환우들이 꼭 알아야 하는 정보들이 많았지만 온갖 부정적인 글들도 넘쳐났다. 초기 진단을 받았던 환우가 몇 년 뒤 재발이나 전이를 통해 말기의 암 환자가 되기도 했고, 극심한 고통을 겪는 환자들의 글들과 사진들, 사망한 환자들의 가족들이 남긴 글들이 가득했다. 특히나 나를 더욱 불안하게 만들었던 내용은 다른 암과 달리 유방암은 꼬리가 긴 암이라 5년이 지난 후에도 완치판정을 내리지 않는다는 것과 20년이 지난 후에도 재발할 수 있다는 내용들이었다. 실제로 10년 또는 20년이 훨씬 지난 시점에 재발이나 전이가 되어 치료받는 환자들의 글이 종종 올라왔다. 그렇다면 평생을 이런 불안감을 안고 살아야 하는 걸까? 그렇다면 살아도 사는 게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점차 부정적인 내용의 글들에 매몰되어 갔고 극심한 불안과 공포에 휩싸였다. 의사 선생님께서는 오른쪽 가슴에 초기로 보이는 병변이 있지만 암세포가 가슴의 절반이상을 차지할 정도로 꽤 넓게 퍼져있었기 때문에 가슴을 전부 절제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하지만 절제한 가슴에는 보형물을 삽입하여 가슴을 복원하는 수술을 동시에 진행할 것이고 새로운 수술법이 개발되어 유륜을 통한 최소한의 절개로 수술이 진행되기 때문에 수술 자국도 크게 남지 않을 거라고 했다. 하지만 암세포가 유두 가까이까지 퍼져있다면 유두를 살려내지 못할 수도 있고, 그렇게 되면 동시복원 수술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수술 자국이 크게 남을 수도 있다고 하셨다. 나는 진단을 받고 나서부터는 하루 종일 환우들이 모인 인터넷 카페를 드나들었고 온갖 부정적인 글들을 읽으며 극도의 불안감에 휩싸여 있었던 상태였기 때문에 복원은 필요 없으니 유두를 포함한 가슴 전부를 절제해달라고 했다. 의사 선생님께서는, 나와 비슷한 또래의 환자들이 치료를 마친 후에 결혼을 하고 아이도 낳고 잘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아직 젊은 나이에 왜 복원 수술을 안 하려고 하느냐며 성형외과 선생님과 상담이라도 한번 해보고 가라고 하시면서 그 자리에서 바로 성형외과에 예약을 해주셨다. 성형외과 선생님은 남자분이셨는데 굉장히 조신하고 차분한 말투로 복원 수술에 대한 내용을 하나하나 친절히 설명해주셨고, 불안했던 내 마음도 진정이 되어 결국 복원 수술을 같이 진행하기로 했다. 유방암 환우들이 모인 카페에서는 항암치료는 매우 힘들지만 치료과정 중에 가장 쉬운 것이 수술이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무통주사에 심한 부작용이 있어서 수술 후 무통주사를 맞으면 극심한 구토증상을 보이고, 무통주사를 안 맞자니 찢고 꿰맨 수술의 고통을 고스란히 느껴야 하기 때문에 남들이 아무렇지 않게 하는 가벼운 맹장수술만 받아도 수술 후 사경을 헤매는 일이 많았고 나한테는 어떤 수술도 쉬운 수술은 없었다. 유방암은 진단 후에 여러 가지 검사를 한다. 미국의 배우 앤젤리나졸리가 했던 브라카 검사도 그중 하나인데 유전성 여부를 확인하는 검사이다. 다행히 브라카 검사에서는 이상이 없는 걸로 나왔기 때문에 나는 유전에 의해서 병에 걸린 것도 아니며 그렇기 때문에 내가 아이를 낳는다고 해도 유전으로 아이가 같은 병에 걸릴 가능성은 없다고 했다. 그렇게 수술 전 각종 검사를 마치고 수술을 하루 앞둔 날, 나는 선생님께 병변이 있는 오른쪽 가슴뿐만 아니라 왼쪽 가슴도 예방적 절제를 하고 싶다고 말씀드렸다. 유방암 진단을 받은 환자는 반대쪽 유방에도 암이 생길 확률이 높기도 하고, 이미 왼쪽 가슴에도 다수의 물혹과 석회가 있었기 때문에 왼쪽 가슴도 예방적 절제를 하고 싶었다. 다행히 선생님께서는 내 의견을 받아들여 주셨고, 그렇게 난 양쪽 가슴을 절제하고 복원하는 수술을 받게 되었다.


어려서부터 허약한 체질로 인해 수술대에 누워본 적이 여러 번 있었기 때문에 수술대에 눕는 것에 큰 두려움이 없었던 나였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침대에 누워서 수술 방으로 가는 동안 미로 같은 길을 따라 여러 개의 문을 통과해야 했는데, 빠르게 지나가는 형광등 불빛만 응시한 채 묵직한 소리와 함께 열리는 문을 하나씩 통과할 때마다 마치 다른 세계로 가는 문을 통과하는 듯한 묘한 느낌과 함께 극심한 두려움이 엄습해 왔다. 수술대에 누워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하겠지만 수술대는 매우 차가워서 수술대에 누우면 저절로 몸이 바들바들 떨린다. 마치 정육점 도마에 올라온 고기가 된 기분이 들었다. 수술방의 의료진들은 분주히 수술준비를 한다. 몸에는 녹색 천이 씌워지고, 코를 찌르는 독한 소독약으로 온몸을 소독한다. 어느 정도 수술준비가 끝이 나자 레지던트로 보이는 젊은 남자 의사가 곧 호흡기를 부착할 거라고 말을 하면서 하고 싶은 얘기가 있는지 물었다. 나는 “혹시나 예상했던 것과 다른 결과가 나오더라도 저희 엄마한테는 얘기하지 말아 주세요”라는 말을 했고, 알았다는 대답과 함께 곧바로 내 얼굴에 호흡기가 씌워졌다. 그리고는 이어서 마취제가 투입이 되었다. 차가운 수술 방 침대에 누워 분주히 움직이는 의료진들을 보는 동안은 공포감에 휩싸였지만, 마취 주사가 투입되고 정신을 잃기 직전에는 매우 편안한 느낌이 들었다. ‘죽는 순간도 이런 기분일까?’ 하는 생각이 들기가 무섭게 나는 정신을 잃고야 말았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났는지 몰랐다. 여러 차례 나를 부르는 의료진의 목소리와 함께 세차게 내 뺨을 후려치는 느낌에 정신이 들었고, 나는 병원 침대에 누워 하얀색 천장만을 바라본 채로 복잡한 길을 이리저리 어지럽게 통과하여 병실에 도착했다. 그때부터가 시작이었다. 도저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이제껏 경험해보지 못했던 극심한 어지러움과 구토증상이 밀려왔다. 음식을 먹고 체했을 때나 다른 수술을 했을 때 경험했던 것과는 비교조차 안 될 정도로 극심했다. 배 멀미의 백배, 아니 천배쯤 되는 느낌이었다.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너무 고통스러워 목소리를 크게 낼 수조차 없었다. 나는 간호사를 불러 달라, 너무 어지럽다, 속이 심하게 울렁거린다는 등 여러 가지 증상을 호소했지만 청력이 좋지 않으신 엄마는 나의 작은 신음소리를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셨고, 말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며 발만 동동 구르셨다. 병원 창문이 보였다. 내가 몸을 일으킬 기운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당장이라도 창문 밖으로 뛰어내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여태까지 살면서 겪어보지 못한 극심한 증상이었다. 목이 타들어 갈 것만 같이 말랐고, 물을 마실 수 없었기에 수건에 물을 적셔 입에 물고 계속 고통을 참고 있었다. 숨이 차고 호흡이 가빠졌다. 내 침대에서 병실 화장실까지는 세 걸음 정도밖에 되지 않는 거리였지만, 화장실로 가는 길에 몇 번을 주저앉았고 화장실에 들어가서도 변기에 앉질 못하고 한참을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호흡을 겨우 가다듬고 나서야 변기에 앉을 수 있었다. 같은 병실에 있던 다른 환자의 어머니가 하시는 말씀이 들렸다. “에휴. 어떡하니? 밤새 저럴 것 같은데. 너 잠 못 잘 텐데 수면제라도 타다 줄까?” 병실에 있는 환자는 전부 암 환자였기 때문에 모두가 힘든 상황이었다. 혹시나 내 신음소리가 그들의 수면에 방해가 되지는 않을까 입 밖으로 소리가 새어 나오지 않도록 밤새 이를 악물고 참았다. 이렇게 글을 쓰는 중에도 그때의 고통이, 한계치를 넘어서는 도저히 견딜 수 없을 것만 같았던 그 고통이 너무도 생생하게 떠오른다. 간호사는 긴 수술로 인한 마취가스 후유증이거나 마약성 진통제의 부작용인 것 같다고 말했다. 구토억제제를 여러 번 맞고 한참이 지나서야 간신히 잠에 들 수 있었다. 다음날 같은 병실의 환자와 보호자는 내가 다른 환자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다해 참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며 나를 대견해했고, 내 수술시간이 9시간이나 됐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내가 수술을 하는 긴 시간 동안 친척 어른들과 사촌 동생이 병원에 와서 엄마 곁을 지켜주었다는 사실에 너무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그들이 없었다면 엄마는 그 긴 시간을 혼자서 어찌 버텼을지 생각만 해도 아찔하고 눈물이 났다. 오후가 될 무렵, 친척 동생한테 괜찮냐는 문자와 함께 어제 본인이 사 온 빵을 건네받는 우리 엄마의 손이 심하게 떨렸었다는 얘기를 전해 들을 수가 있었다. 성인이 되면서부터는 친척동생과 거의 왕래가 없었는데 내 수술 소식을 듣고 달려와 준 동생에게 너무 고마운 마음이 들었고, 그 긴 시간 동안 수술실 밖에서 마음을 졸였을 엄마를 생각하니 가슴이 미어졌다. 내가 건강한 딸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너무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수술이 너무 길어지고 날이 어두워지자 친척들이 하나, 둘씩 집으로 돌아갔고 아마도 1-2시간 정도는 엄마 혼자 수술이 끝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았다. 그때 어떤 다른 환자의 보호자가 엄마한테 따님이 아직 수술이 끝나지 않았냐고 물으면서, 오늘 여러 명이 수술실에서 죽어 나갔다는 소리를 했다고 했다. 그 소리를 들은 엄마가 수술실 밖에서 얼마나 공포에 떨었을지, 엄마가 한없이 가엾고 애처롭게 느껴졌다. 평생을 착하게 살아오신 엄마는, 내가 아픈 것이 모두 본인의 덕이 부족하고 죄가 많아 그런 거라고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래서 본인의 지난날을 돌아보며 자신이 잘못 살아오지는 않았는지 많은 생각을 했는데, 어렸을 적 시골에서 친구들과 장난 삼아 이웃집 밭에서 참외인지, 수박인지 서리를 했었는데 그것 때문에 벌을 받는 건가 하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이 이야기를 들은 나의 친구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그 자리에서 울음을 터뜨렸다. 엄마가 얼마나 착하게 살아오셨으면 아무리 돌아봐도 잘못한 게 없으니 고작 어릴 때 서리를 했던 것을 생각했겠냐며 소리내어 흐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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