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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 이 Mar 07. 2023

나를 위한 편지

노인이 된 너.

편지가 도착했다. 발신인은 바로 ‘나’였다! 불현듯,  '10년 후의 나‘에게  편지를 쓰는 프로그램 내내 고심했던 기억이 났다. 우상향의 인생 그래프를 그려나가리란 다짐을 하며 봄빛 가득한 오늘을 상상했었다.

10년 전의 나는 지금의 날 슬프게 한다. 편지는 노력과 인내에 대한 보상을 믿던, 여전히 인생을 모르던 내게 연민을 일으켰다.  10년이란 시간이  충분하고 넉넉한 시간으로 느껴졌나 보다. 무엇 하나라도 안정되고 여유로워질 거라는 믿음은 확신처럼 굳건했다. 윤택한 삶을 사는 사람, 마음이 풍요로움으로 넘치는 그런 삶을 살 수 있으리라 상상했다. 하지만  마지막 줄에 적힌 "넌 할 수 있어! 그렇지?"라는 응원 같은 다짐에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미안해! 해내지 못했어. 아니 해낼 수 없었어. 인생은 ‘DMZ’를 걷는 것 같더라. 온통 수풀에 쌓인 길은 찾을 수 없었고 곳곳의 지뢰는 밟고 난 후에야 알아챌 수가 있었어. 세월이 흐른다고 저절로 나아지는 건 없었지. 난,  아직 길을 찾지 못했단다." 앞에 있다면 변명하고 싶은 말들이었다.


가라앉은 채 바라본 창밖은 자리를 내어주기 싫은 겨울이 한숨 같은  바람을 내뱉고 있었다.  10년 전의 그날 처럼. 하지만 이내, 차례로 꽃들이 피어나는 봄은 나만 놓아둔 채로 앞서갈 것이다. 문득, 지금처럼 의기소침할  10년 후 봄날의 내게  편지를 보내고 싶어졌다.

 그저 기대감 없이 안부를 묻고 위로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때의 나는 웃고 있길 바라기 때문이다.


                              

첫 번째 편지



안녕. 나야

너는 이미 알고 있었단다. 인생은 알 수도 어쩔 수도 없다는 걸. 그러니 이 편지를 보게 된다면 그저 반갑게 웃으렴. 너무도 아름다운 봄날 일 테니. 혹시 비가 온다면 밖으로 나가 마지막 꽃비를 맞아보는 건 어떻겠니? 눈 같은 꽃잎이 쌓인 봄의 땅처럼 갈라진 틈새를 적셔보는 거지.


무언가 엔 주눅 들고, 무언가에는 당당해져 있을 너. 10년 전에 편지를 보낸 날처럼 오늘은 초봄의 아무 날이란다.  조금 전까지 만해도 미래를 꿈꾸던 널 무척이나 어리석게 생각하고 있었단다.

 

하지만  편지를 써 내려가다 깨달았어. 그런  네가 얼마나 빛나는 사람이었는 지를, 그래서 정말 다행이었다고  생각하게 됐지. 미래를 꿈꾼 만큼,  더욱 필사적이었어. 너는 치열하게 일으켜 세우고 있었던 거야. 상처만 남았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단단해져서 삶을 내려다보게 되었지. 세상에 대한 진리는 이미 알고 있었어. 수많은 성현들과 철학자들이 말한 모든 것은 사실이었지. 하지만 바이러스처럼 들어와 아프고 나서야 깨닫는 거더라. 항체를 만들고 살아남아야만 비로소 내게 진리가 되는 거였어.


너는 한동안 많이 아팠지만 무사히 버텨냈단다. 그래서 결국엔 여자나 엄마이기 전에 '나'라는 한 사람으로서 최적의 자리를 찾았어. 아프지 않았다면 상처와 원망이 자리할 그 자리에 ‘믿음과 응원’이 채워졌지. 그래서 순전히 너를 위해 대학에 입학하기도 했단다. "그 나이에 무슨 소용이야?"라는 만류에도 그저 무언가를 하고 싶은 마음을 행동으로 옮겼어. 가성비 없는 노력일지 모르지만 지금의 내가 하고 싶은 걸 실행한 용기, 그거 하나만으로 만족스럽단다. 그리고 그저 좋다는 것이면 쟁이듯이 채우는 중이야. 뭐가 될지 모르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구나. 지금은 그 시간이 가장 행복하니까.


오늘보다 어느 만큼 늙은 너!

지금쯤 ‘노인’이라는 카테고리 안에 들어가 있니? 사회가 정해놓은 생애 주기의 마지막, 너무도 생경한 신분.

자꾸만 마음이 이상하니? 세월은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간 모래알처럼 허무하니? 그래도 체념이 아닌 순응하는 마음으로 줄을 서렴.

교회에서 성탄절 선물을 받는 아이처럼. 두 손을 내밀어 기꺼이 선물을 받으렴. 착한 아이에게만 주는 선물을 받을 자격이 충분하단다. 맘껏 기뻐하고 행복해해도 된단다.


지금의 나의 행보가 돈도 명예도 만들지 못했더라도, 너는 늙은 것이 아니라 성숙했다고 생각하렴.

행색은 초라해졌어도 지금의 내가 자라서 네가 되었다는 걸, 여전히 너를 키우고 있는 나를 잊지 않았기를 바란단다.


그리고 나이 먹었다고 주눅 들지 말고, 누구의 눈치도 보지 말았으면 좋겠구나. 깨달은 진리가 네게 자유를 주었으니 계속해서 가볍게 걸어 나가렴. 하지만 나이 먹은 것이 자랑도 아니니 입보다는 지갑을 잘 여는 사람이면 좀 더 멋지겠구나.


무엇보다, 늘 웃는 모습이어서 자꾸 보고 싶은 사람이 되어 있기를.


                                                                                                                          사랑하는 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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